[가규 양도 賈逵 梁道]
가규의 자는 양도이며 하동군 양릉현 출신이다. 174년에 태어나 228년에 사망한다.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하여 조부 가습은 “너는 자라서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수만 자가 넘는 병법을 전수해 주었다.
처음에는 강읍의 장이 되었다. 원상의 장수 곽원이 하동을 공격하였는데 그가 지나간 성과 읍은 모두 함락되었는데 가규가 지키는 성은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곽원은 흉노 선우 호주천까지 불러 성을 공격하였는데 성이 함락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성이 함락당하고 가규는 포로가 되었는데 곽원은 가규를 등용하려 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곽원은 가규를 죽이려 하였지만 강읍의 관리와 백성들이 반대하자 죽음을 면하였다. 가규는 피지현을 중요한 요충지라 여기고 있었는데 곽원이 하동을 평정하고 피지현을 점령할까 두려워한 가규는 곽원의 모사 축오를 미혹시켜 이레 동안 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곽원이 종요와 마초의 군대에게 패배하자 가규는 풀려나게 되었다.
가규는 무재로 천거되고 면지의 영으로 제수되었다. 205년 고간이 조조를 배신하자 장염은 병사를 일으켜 호응하려 하였다. 가규는 장염의 의도를 모르고 장염을 만났다가 변고가 일어날 것을 알았으나,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장염에게 가담하였고 장염은 가규를 믿었다. 가규는 현의 치소가 있는 여성의 성벽과 연못이 견고하지 못하였는데 가규는 장염에게 군사를 얻어 성을 수리했다. 가규는 반란을 꾀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성벽을 수리한 가규는 장염에게 저항했다. 장염이 패배하고 가규는 조부가 사망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후에 사도의 부름을 받아 연이 되었다가 의랑의 신분으로 사예교위의 군사일에 참여했다.
조조가 마초를 정벌하면서 홍농의 도달했을 때 요충지라고 생각하여 가규를 홍농태수에 임명한다. 조조는 가규를 불러 일을 상의하고는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 후 병사를 파견할 때 둔전도위가 도망친 백성을 숨겼다고 의심했다. 둔전도위는 홍농군에 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규에게 불손하게 행동하였다. 가규는 화가 나서 둔전도위를 잡아 그의 죄를 일일이 나열하고 다리를 부러뜨렸는데 이 일로 면직 된다.
조조는 가규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여 승상주부에 임명했고 조조가 유비를 정벌할 때 먼저 가규를 보내 야곡까지 파견하여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후에 간의대부로 승진시키고 하후상과 함께 군사상의 일을 논의하게 했다. 조조가 사망하였을 때는 가규는 장례의식을 주관하였다. 언릉후 조창이 장안에서 낙양으로와 가규에게 옥새가 있는 곳을 물었다. 가규는 정색하고 “나라에 대를 이을 사람이 있으니 군후께서 물을 일이 아니다”라고 하며 대답하고 가규는 조조의 관을 받들어 업으로 옮긴다.
조비가 왕위에 오른 후 업현의 대부분 백성들이 법을 따르지 않자 가규를 업현의 영으로 임명했다. 한 달 후 위군태수로 승진하였다. 조비가 대군을 출정시킬 때 승상주부좨주로 승진하였다가 군대가 초현에 이르렀을 때 가규를 예주자사로 임명한다. 주와 군의 대부분 기강이 흐트러져있자 가규는 예주의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가규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222년 (황초 3년) 조휴,장료 등과 함께 가규는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동포에서 오나라 장군 여범을 격파하여 양리정후로 봉해지고 건위장군으로 임명된다.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즉위하였을 때 손권은 동관에 있었는데, 그 곳은 예주 남쪽에 해당하였으며 장강으로부터 400여리 떨어져 있었다. 위나라 예주의 군대는 항읍에 있었는데, 여남과 익양의 여러군의 국경을 수비하고 있었다. 손권은 북방으로 근심이 없었고 동서로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군을 합쳐 구원하였기 때문에 평상시 실수가 적었다. 이에 가규는 강까지 곧장 가는 도로를 개통할 것을 생각하여 진언하였는데 조예는 동의하였다.
228년 (태화 7년) 조예는 사마의와를 강릉으로부터 조휴를 완현으로 하여 두갈래로 나눠 오나라를 정벌하게 한다. 가규는 전장군 만총, 동완 태수 호질 등 사군을 통솔하여 조휴와 합류한다. 조휴가 환현 태수 주방의 거짓 항복을 믿고 적진 깊숙히 들어갔다가 대패하자 가규는 갑옷과 깃발, 진군 북을 들어 대군으로 보이게 해 조휴를 구출해 낸다. 당초부터 가휴와 조휴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전에 조비가 가규에게 도독을 맡기려하자 조휴는 성격 문제를 들어 임명되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시호를 숙후라 하였고 아들 가충이 작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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