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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243. 종회 사계

[종회 사계 鍾會 士季]

 

종회의 자는 사계이며 영천군 장사현 출신이다. 225년에 태어나 264년에 사망한다. 태부 종요의 작은아들이며 그는 어려서 민첩하고 현명하며 조숙했다. 중호군 장제가 문장을 썻는데 그 사람의 눈동자를 관찰하면 그 사람을 충분히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종회가 다섯 살 때 종요는 그를 장제에게 보내 만나도록 하였다. 장제는 매우 기이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이 아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는데 장성한 종회는 셈법과 기예에 재주가 있었으며 박학하고 명리에 정통하였다. 배우고 익힐 때는 밤낮으로 수련하였으며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정시 연간에 비서랑에 임명되었으며 상서중서시랑으로 옮겼다. 조모가 황제가 되었을 때는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켜 대장군 사마사가 토벌에 나섰을 때 그를 따랐으며 기밀 사무를 담당하였고 위장군 사마소는 대군의 후방을 담당하였다. 난을 진압한 후 사마사가 사망하자 사마소가 군을 통솔하게 되었는데 낙양의 조모는 군을 수도 밖에 두고 궁으로 입궐하는 것을 명령하였지만 종회는 부하와 상의하여 부하로 하여금 표를 올리도록 하고 사마소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갔다. 조모는 할 수 없이 사마소에게 사마사의 모든 직위를 물려주게 된다. 종회는 황문시랑으로 승진하고 무정후로 봉해진다.

257 (감로 2) 조정에서 제갈탄을 불러 사공으로 삼았는데 이 당시 종회는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다. 종회는 제갈탄이 명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재빨리 사마소에게 아뢰었는데 사마소는 이미 행한 일을 다시 돌이켜 바꿀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는 토벌을 하기 위해 수춘으로 갔는데 종회도 그를 따라갔다. 제갈탄은 양주자사 악침을 죽이고 오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는데 오나라에서는 장수 전역, 전단, 당자, 왕조 등을 비롯해 병사 3만 명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당시 건업에서는 전씨 가문 내에서 싸움이 일어나 서로 소송을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역의 형 전서의 아들 전휘와 전의는 건업에 남아있었는데 모친을 모시고 수십 명의 부하들을 인솔하여 장강을 건너 사마소에게 귀순하였다.

종회는 계략을 세우고 비밀리에 전휘와 전의를 위해 편지를 써서 가까이 신임하는 자에게 편지를 들려보내 성으로 들어가 전역등에게 말하도록 했다. 그 편지는 오나라 내부에서는 전역 등이 수춘을 공격하여 이길 수 없음에 노하여 장수들의 가족을 모두 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도망쳐 귀순한 것이라고 되어있었다. 전역 등은 두려웠으므로 수하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동쪽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했다. 그들은 모두 작위를 하사 받고 총애를 받았으며 이로부터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뜻이 갈리게 되었다. 수춘을 격파하는 데에는 종회의 공이 컸으므로 사마소는 날이 갈수록 종회를 더욱 후하게 대하고 신뢰하였다.

난을 진압한 후 종회는 태복으로 승진되었지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중랑의 신분으로 대장군의 부서에서 기실의 일을 담당하며 대장군의 심복이 되어 긴요한 직책을 맡았다. 종회는 제갈탄을 토벌한 공으로 진후의 작위를 받게 되었지만 누차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후에 사예교위로 승진하였으며 배수나 양호를 견제하면서 사마소의 신임을 얻고자 하였고 완적이나 혜강을 모해하여 살해당하게 일을 꾸미기도 하였다. 사마소는 촉나라의 강유가 자주 침범하여 이번 기회에 촉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사마소는 종회가 촉나라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촉의 지형을 조사하고 당시의 형세를 연구하고 의논하였다.

262 (경원 3) 가을 종회를 진서장군과 가절도독관중제군사로 임명하였고 사마소가 청주,서주,연주,예주,형주,양주 등 여러 주에 명령을 내려서 함께 배를 만들도록 하였다. 또 당자에게 바다를 건널 큰 배를 만들도록 명령했는데 외부에서는 오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해 겨울에 촉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등애와 제갈서에게 각기 3만의 병사를 통솔하도록 명령하였다. 등애는 감송과 답중 일대로 가서 강유와 교전하며 견제하였고 제갈서는 무기와 교두로 가서 강유의 퇴로를 끊어놓았다.

종회는 10만의 병사를 인솔하여 야곡과 낙곡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아문장 허의에게 앞쪽에서 길을 닦아 열도록 하고 종회는 뒤를 따랐다. 그러나 교량에 구멍이 생겨 말의 발이 빠져 들어가자 종회는 허의를 참수했다. 촉나라는 각 보루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싸우지 말고 물러나 한성과 악성으로 돌아가 지키라고 하였다. 위흥 태수 유흠은 자오곡으로 달려갔고 나머지 군사는 몇갈래 길로 나란히 진군하여 한중에 도착하였다. 촉나라의 감군 왕함은 악성을 지키고 호군 장빈은 한성을 지켰는데 각각 병사가 5000명씩 있었다. 종회는 호군 순개와 전장군 이보로 하여금 각기 1만 명을 통솔하도록 하였고 순개는 한성을 이보는 악성을 포위하였다. 종회는 길을 지나 양안구로 와서 사람을 보내 제갈량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호군 호열 등으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관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게 하고 창고에 쌓아둔 곡식을 얻게 되었다.

답중에서 돌아온 강유는 음평으로 가서 병사들을 모은 다음 관성으로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관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물러나 백수로 가서 총나라 장수 장억, 요화 등과 검각을 지키며 종회에게 대항했다. 등애는 강유를 쫓아 음평으로 가서 정예 병사를 선발한 다음 한덕양으로부터 강유와 좌담도로 들어가 면죽으로 가서 제갈서와 함께 곧장 성도로 전진하려 하였다. 제갈서는 본래 강유와 교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그대로 백수로 진군하여 나가 종회와 합류하였다. 종회는 장군 전장 등을 파견하여 검각 서쪽으서부터 곧장 강유를 통과하게 하였는데 100리를 채 못가서 전장은 촉나라의 복병 세 부대를 격파하였다.

등애는 전장에서 선봉을 섰고 종회와 제갈서의 군대는 검각으로 향했다. 종회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장악하려고 제갈서가 두려워하며 전진하지 않는다는 상소를 몰래 올렸는데 제갈서는 죄인용 수레에 태워 돌아오게 하였다. 군대는 전부 종회에게 귀속되었고 종회는 나아가 검각을 공격했지만 강유의 필사적인 저항하였다. 등애는 곧 면죽으로 가서 제갈첨을 죽이고 강유는 제갈첨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물려 파로 들어갔다. 종회는 곧바로 부까지 진군하고 호열, 전속, 방회 등을 파견하여 강유를 추격하도록 하였다. 등애는 성도로 진군하였고 유선은 등애에게 가서 투항하였으므로 강유 등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종회에게 투항하도록하였다. 강유는 광한군 처현까지 와서 병사들에게 모두 병기를 버리라고 명령하고 부절과 전거를 호열에게 보내고 종회에게 가서 투항하였다. 종회는 군사들을 엄격하게 하여 침략과 약탈을 못하게 하였고 스스로를 겸허하게 낮추어 촉나라의 관료들과 교분을 맺었고 강유와의 감정도 매우 좋아졌다.

종회는 내심 모반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등애가 황제의 명령을 이어 받아 정권을 휘둘러 군사일을 처리하였으므로 은밀히 상소를 올려 등애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등애를 죄인용 수레에 태워 돌아오도록 불렀다. 등애가 본국으로 소환 당하자 종회는 즉시 독자적으로 대군을 통솔하였고 그 위세는 서쪽 변방 지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스스로 공명이 세상을 덮으니 다시는 다른 사람 밑에서 있을 수 없고 게다가 용맹한 장수와 정예 병사들이 모두 자기 수하에 있다고 말하고 곧 모반을 계획하였다. 그는 강유 등으로 하여금 모두 촉나라 군사들을 인솔하여 야곡을 나가도록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뒤를 따르려고 하였다. 장안에 도착한 후 종회는 기병은 육지로 행군하도록 하고 보병은 수로를 타고 내려가 위수로부터 황하로 들어가 닷새 만에 맹진에 도착하게 되면 기병과 낙양에서 합쳐 하루아침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소는 이를 눈치채고 장안으로 직접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오자 장안 공격 계획은 포기하게 된다.

254 (경원 5) 정월 15일 종회는 성도에 도착해 다음 날 호군, 군수, 아문기독 이상의 관리들과 옛 촉나라의 관리들을 모두 초청하여 촉나라 조정에 명원황후의 상을 당했음을 발표했다. 명원황후가 남긴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종회에게 병사를 일으켜 사마소를 폐하도록 했다고 하였는데 위조한 조서를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보여 주고 아랫사람에게 의논을 끝내게 한 뒤 목판에 쓴 증서로 관직을 임명하였으며 또 신임하는 사람을 보내어 각 군대를 대신 관리하도록 하였따. 초대 받아 온 관리들은 익주 관서에 모두 가두고 성문과 궁문을 모두 닫고 병사들에게 엄하게 포위해 지키도록 하였다. 종회의 장하독 구건은 본래 호열의 부하였는데 호열이 그를 사마소에게 추천했고 종회는 사마소에게 구건이 자신을 따르게 해 달라고 청하여 그를 매우 신임하고 아꼈다. 구건은 호열이 혼자 구금된 것을 불쌍히 여기고 종회를 만나서 친병을 안으로 들여 보내 음식을 나르게 해 줄 것을 청했다. 각 아문의 병사 또한 그 예에 따라 한 명씩 드나들었다.

호열은 아들 호연에게 편지를 보내 구건이 몰래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종회는 이미 큰 굴을 뚤고 수천개나 되는 흰 몽둥이를 준비하여 외부에 병사들을 불러들여 사람들마다 편모를 주어 패잔한 장수로 삼아 순서대로 몽둥이로 때려 굴 속으로 던지려 한다고 하였다. 각 아문의 친병 또한 모두 이와 같은 말을 하였고 하룻밤 사이에 서로 말로 전하여 전원하게 알려졌다. 어떤 사람이 종회에게 아문기독 이상을 전부 죽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종회는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18일 정오에 호열 군중의 병사들과 호열의 아들 호연이 북을 울리며 문을 나서자 각 군의 병사들은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북을 울리며 함성을 지르고 나왔으며 지휘하는 자가 없는데도 성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마침 종회는 강유에게 무기를 주고 있었는데 밖에 시끄러운 소리가 큰 불길처럼 일고 있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다. 종회는 깜짝 놀라 강유에게 물으니 강유는 그들을 공격하라고 하였고 종회는 병사를 보내 붙잡혀 있는 아문과 군수를 모조리 죽이도록 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물을 들어 문을 부수고 사병들은 대문을 부쉈으므로 격파할 수 없었다. 곧 성문 밖에서는 사다리에 의지 하여 성으로 올라오니 아문과 군수들은 각기 흩어져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 부하 병사들과 합류했다.

병사들은 강유와 종회를 죽였는데 당시 종회의 나이 40이었다. 당초 등애는 태위로 임명되고 종회는 사도로 임명되었지만 모두 임명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종회는 형 종육의 아들 종옹이 종회를 수행하다가 함께 죽었는데 종회가 기른 형의 아들들인 종의, 종준, 종천 등은 모두 하옥되었으며 당연히 참수되어야 했었다. 사마소는 형식상으로 황제 조환에게 이를 상주했고 조환은 종요와 종육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들은 용서하고 관직과 작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종회를 따라 수행했던 종의와 종옹의 자손은 멸족되었다. 종회가 죽은 후 그의 집에서 서적 20편을 얻었는데 제목을 도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형명가의 저작이었으며 그 글이 종회가 쓴 것과 비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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