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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245. 왕평 자균

[왕평 자균 王平 子均]

 

 

왕평의 자는 자균이며 파서군 탕거현 출신이다. 생년 미상이나 248년에 사망한다. 왕평은 본래 외가 하씨에게서 자랐는데 나중에 성을 왕으로 고쳤다. 두호와 박호를 따라 낙양으로 가서 교위 관직을 받았고 조조의 한중 정벌을 수행하였다. 그 때 유비에게 항복하여 아문장, 비장군으로 임명된다.

228 (건흥 6) 왕평은 참군 마속의 선봉대에 소속되어 제갈량의 북벌에 참전한다. 가정 전투에서 마속이 수로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진을 구축하고 어지럽게 지휘하자 왕평은 여러 번 마속에게 간하였다. 하지만 마속은 왕평의 의견을 무시하고 가정에서 싸워 크게 패배하였다. 마속의 부하들은 패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오직 왕평이 인솔하는 1000명 만이 북을 올리며 스스로 굳게 지켰는데 위나라 장수 장합은 복병을 의심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왕평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돌아갔다. 이 전투로 제갈량은 마속, 장휴, 이성을 죽이고 장군 황습의 병사를 빼앗았다. 왕평은 특별히 크게 표창을 받고 참군을 더하였다. 또 왕평에게 오부의 병사 통솔권을 주고 군영의 일을 맡겼으며 지위를 토구장군으로 높이고 정후로 봉했다.

234 (건흥 12) 제갈량이 무공에서 죽자 군대를 물려 돌아왔고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평은 한 차례의 전투로 반란을 진압하였다. 왕평은 후전군, 안한장군으로 승진했으며 거기장군 오의를 도와 한중에 주둔하면서 또한 한중 태수를 겸했다. 237년에 안한후에 봉해지고 오의 대신에 한중을 다스렸다. 238년 대장군 장완이 면양에 주둔하고 있을 때 왕평은 다시 전호군이 되어 장완 막부의 일을 맡았다. 243년에 장완은 돌아와 부현에 주둔하고 왕평은 전감군, 진북대장군으로 임명되어 한중을 다스렸다.

244 (연희 7) 위나라 대장군 조상이 십만 명을 이끌고 한천으로 향했는데 선봉은 벌써 낙곡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때 한중에서 수비하는 군사는 3만 명이 안되므로 장수들은 매우 놀랐는데 지금 형세가 불리하니 한중과 낙성을 굳게 지키자고 하였다. 하지만 왕평은 지금은 유민과 두기를 보내서 흥세를 점거하도록 하고 후방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군 유민만이 왕평의 견해에 동의하고 곧바로 시행하였다. 부현의 여러 군대와 대장군 비의가 성도로부터 서로 연달아 이르르니 위나라 군대를 물러갔다.

왕평은 전장에서 자라 글자는 열 글자 정도 밖에 쓰지 못했지만 구술로 작성한 문서는 모두 식견이 있고 조리 있었다. 왕평은 사람들에게 사기와 한서의 여러 기전을 읽도록 하며 그 것을 듣고 그 대의를 모두 알았으며 이따금 논설하는 가운데 그 주된 뜻을 잃지 않았다. 그는 법도를 잘 지키고 말할 때는 농담을 하지 않았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으므로 무장 다운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성품이 옹졸하고 의심이 많아 사람들을 스스로 경시함으로써 손해를 입었다. 248년에 사망하고 아들 왕훈이 뒤를 이었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한중공방전 때 서황의 선봉대를 맡지만 서황은 간언을 해도 듣지 않았다. 그러다 서황이 대패하자 서황에게 반감을 가져 유비에게 투항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후 남만 정벌에서 맹획의 부인 축융을 포로로 잡고 위의 하후무를 생포하는 등의 공을 세우다가 이후 북벌에 대한 내용은 정사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