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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314. 유선 공사

[유선 공사 劉禪 公嗣]





유선의 자는 공선이며 촉나라 2대 황제이다. 출신지는 불명이며 207년에 태어나 271년에 사망한다. 유비의 장남이며 감부인의 소생이다. 아명은 아두였다.

 

207(건안 12) 유비가 형주자사 유표에게 의지할 때 태어난다.

 

208(건안 13)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자 장판파에서 조조군에 의하여 죽을 뻔 했지만 조운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진다.

 

219(건안 24)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유선을 왕태자에 임명한다.

 

223(장무 3) 유비가 영안궁에서 사망하자 유선은 17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한다. 즉위하면서 연호를 건흥으로 바꿨고 이해 여름 장가태수 주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일전에 익주군의 호적 옹개가 태수 장예를 오나라로 내쫓고 군을 점령한 체 복종하지 않았다. 또한 월수의 왕 고정이 배신했다. 장비의 딸을 황후로 봉하고 상서랑 등지를 오나라로 보내 우호를 굳게 하자 오왕 손권은 촉과 화친하여 사자를 보내 방문하니 서로 우호를 맺게 되었다.

 

224(건흥 2) , 농사에 힘쓰며 곡식을 기르게 하고 관문을 닫고 백성들을 쉬게했다.

 

225(건흥 3) 승상 제갈량이 남쪽으로 4(장가, 월수, 익주, 영창)을 정벌하여 모두 평정했고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바꾸고 영창군을 갈라 운남군을 설치한다. 또한 건녕군과 장가군을 갈라 흥고군을 설치했다.

 

226(건흥 4) 도호 이엄이 영안에서 강주로 돌아와 머물고 큰 성을 쌓았다.

 

227(건흥 5) 제갈량이 출병해 한중에 주둔하고 면수 북쪽 양평 석마에 영채를 세웠다.

 

228(건흥 6) 제갈량이 출병해 기산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했다. 그 해 겨울 다시 산관을 나와 진창을 포위했지만 군량이 다해 물러났다. 왕쌍이 제갈량을 추격하였지만 제갈량은 왕쌍을 격파하고 참수한 후 한중으로 돌아왔다.

 

229(건흥 7) 제갈량이 진식을 무도, 음평으로 보내 공격하게 하고 두 군을 평정했다.

 

230(건흥 8) 사마의는 서성, 장합은 자오, 조진에게 야곡을 지나게 해 한중을 공격하려 했다. 제갈량은 성고, 적판에서 이들을 기다렸는데 큰 비가 내려 길이 끊기자 모두 퇴각하였다. 같은 해 위연이 양계에서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했다. 유선은 노왕 유영을 감릉왕으로 옮기고 양왕 유리는 안평왕으로 삼았다.

 

231(건흥 9) 제갈량은 다시 출진해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로 운반했다. 사마의와 장합이 기산을 구원했다. 제갈량은 군량이 다해 군을 물렸는데 장합이 추격해오자 청봉에서 교전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 8월 도호 이엄을 재동군으로 유배한다.

 

232(건흥 10) 제갈량이 군사들을 쉬게 하며 황사에서 농사를 장려하고 유마, 목우를 완성하였다.

 

233(건흥 11) 제갈량은 쌀을 운받해 야곡구를 쌓고 야곡의 창고를 수리했다. 이 해 남쪽 이민족인 유주가 모반하자 장군 마충이 격파했다.

 

234(건흥 12) 제갈량이 야곡을 거쳐 출병하고 처음으로 유마로 운량했다. 8월 제갈량이 위반에서 사망했다. 정서대장군 위연이 승상 장사 양의와 권력을 다투었는데 군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다 위연이 패주했다. 위연을 참수하고 양의는 군대를 이끌고 성도로 돌아왔다. 좌장군 오의를 거기장군으로 삼고 승상 유부장사 장완을 상서령으로 삼고 국사를 총통하게 했다.

 

235(건흥 13) 중군사 양의가 한가군으로 유배되었다. 4월 장완의 지위를 대장군으로 올렸다.

 

236(건흥 14) 유선이 관판에 올라 문수의 물흐름을 보고 열흘 뒤에 성도로 돌아왔다. 무도 저왕 부건과 저민 4백여 호를 광도현으로 옮겼다.

 

237(건흥 15) 황후 장씨가 죽었다.

 

238(연희 원년) 장황후의 여동생을 황후에 봉했다. 아들 유선을 태자로 세우고 아들 유요를 안정왕으로 삼았다. 11월 대장군 장완이 출병해 한중에 주둔했다.

 

239(연희 2) 장완의 지위를 대사마로 올렸다.

 

240(연희 3) 월수 태수 장의를 시켜 월수군을 평정했다.

 

241(연희 4) 상서령 비의가 한중에 도착해 장완과 함께 일의 계획을 의논했다.

 

242(연희 5) 감군 장유가 군대를 이끌고 한중에서 부현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243(연희 6) 대사마 장완이 한중에서 돌아와 부현에 머물렀다. 상서령 비의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244(연희 7) 위나라 대장군 조상, 하후현 등이 한중을 공격하려 하자 진북대장군 왕평이 흥세주변에서 이를 막았다. 대장군 비의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니 위군이 퇴각했다.

 

245(연희 8) 황태후가 사망하고 대장군 비의가 한중에 도착해 수비군을 순시했다.

 

246(연희 9) 대사마 장완이 사망한다.

 

247(연희 10) 양주의 호왕 백호문, 치무대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위장군 강유가 이들을 맞이해 안무하고 촉군 번현에 거처하게 했다. 이해 문산군 평강현의 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강유가 가서 격파했다.

 

248(연희 11) 대장군 비의가 출군해 한중에 주둔했다. 가을에 부릉속국의 백성과 이민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거기장군 등지가 가서 공격해 모두 격파하였다.

 

249(연희 12) 위나라 대장군 조상이 주살당하자 우장군 하후패가 와서 항복했다. 위장군 강유가 출병해 옹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장군 구안, 이소가 위나라에 항복했다.

 

250(연희 13) 강유가 다시 서평으로 출진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251(연희 14) 여름, 대장군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지만 겨울에 다시 한수에 머물렀다.

 

252(연희 15) 오왕 손권이 사망했다. 아들 유종을 세워 서하왕으로 삼았다.

 

253(연희 16) 대장군 비의가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순에 의해 한수에서 살해되었다. 위장군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남안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254(연희 17) 강유가 성도로 돌아와 여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농서로 출병했다. 겨울에 농서군 적도, 하관, 임조 세 현의 백성을 뽑아 광한군 면죽현과 촉군 번현에 거처하게 했다.

 

255(연희 18)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가 여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적도로 출병하여 옹주자사 왕경과 조수에서 싸워 대파했다. 왕경은 물러나 적도성을 지키고 강유는 종제에 주둔했다.

 

256(연희 19) 강유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융마를 지휘하도록 했다. 진서장군 호제와 상규에서 만나기로 했는지 호제가 약속을 어기고 도착하지 않았다. 8월 위나라 대장군 등애에게 상규에서 격파되었다. 강유는 군대를 물려 성도로 돌아왔다. 아들 유찬을 세워 신평왕으로 삼았다.

 

257(연희 20) 위나라 제갈탄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강유가 군사를 이끌고 낙곡으로 출병했다.

 

258(경요 원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사관이 경성에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여 연호를 고친다. 환관 황호가 처음으로 전정을 시작했다.

 

259(경요 2) 아들 유심을 북지왕, 유순을 신흥왕, 유건을 상당왕으로 삼았다.

 

260(경요 3) 이전에 사망한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이어 261년에 조운의 시호를 추증했다.

 

262(경요 5) 서하왕 유종이 사망했다. 강유가 다시 군을 이끌고 후화로 출병했지만 등애에게 격파당하고 답중에 주단했다.

 

263(경요 6) 위나라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정서장군 등애, 진서장군 종회, 옹주자사 제갈서에게 명해 여러 길로 향해 촉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좌우거기장군 장익, 요화, 보국대장군 동궐 등을 보내 이를 막았다. 연호를 염흥으로 고쳤다. 이해 겨울 등애가 위장군 제갈첨을 면죽에서 격파했다. 광록대부 초주의 계책을 채용해 등에에게 항복했다. 이날 북지왕 유심이 망국에 비통해하며 먼저 처자식을 죽인 후 자살했다. 등애가 성 북쪽에 도착하자 유선은 수레에 관을 싣고 스스로 몸음 묶어 항복의 의식을 하여 군루의 문으로 나갔다. 등애는 결박된 것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유선을 청하여 맞아들여 서로 만났다. 등애는 황제의 권한을 행사하여 유선을 표기장군으로 임명했다. 수비군들은 모두 유선의 칙서를 받고 나서 항복했다. 등애는 후주를 옛 궁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그곳으로 가서 만났고 물자는 엄정히 해두고 쓰지 않았다.

 

264 (경원 5) 정월 등애가 체포되었다. 종회는 부에서 성도에 이르러 난을 일으켰다. 종회가 죽은 뒤 촉 중의 군사들이 초략하니 죽거나 다친 자가 많았고 며칠 뒤에야 안정되었다.

 

유선과 전 가족은 동쪽으로 옮겨졌고 낙양에 도착한 뒤 책명을 내렸다. 유선에게 안락현공으로 임명하고 식읍 만 호, 비단 만 필, 노비 백 명을 하사하고 기타 물건은 이에 상응하게 했다. 그 자손 3명을 도위로 삼았고 후에 봉한 자는 50여명 이었다. 상서령 번건, 시중 장소, 광록대부 초주, 비서령 극정, 전중독 장통은 나란히 열후에 봉했다.

 

한진춘추에 사마소와 유선이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를 위해 옛 촉의 가무를 짓게 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으나 유선은 기뻐하고 웃으며 태연자약했다. 왕이 가충에게 말했다. “사람이 무정하니 가히 이 지경에 이른 것이오! 비록 제갈량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능히 보필하여 오래 보전하지 못했을 것인지 하물며 강유겠소라고 말했다. 가충은 이와 같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어찌 그를 아우를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다른 날 사마소가 유선에게 촉나라가 그립지 않냐고 하자 유선은 여기가 즐거워 촉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극정이 이를 듣고 만나기를 청한 후 유선에게 말했다. “왕이 뒤에 묻거든 흐느끼며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선인들의 분묘가 멀리 농, 촉에 있어 마음이 서쪽을 향해있고 비감하니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눈을 감으십시오라고 말했다.

 

때마침 사마소가 다시 묻자 그처럼 대답했다. 사마소는 어찌 극정의 말과 같단 말이오!”라고 하자 유선이 놀라서 쳐다보며 참으로 당신의 말씀과 같습니다라고 하니 좌우에서 모두 웃었다.

 

271(태시 7) 유선은 낙양에서 사망했고 시호를 내려 사공이라 했다. 아들 유순이 후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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