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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312. 곽회 백제


[곽회 백제 郭淮 伯濟]




곽회의 자는 백제이며 태원군 양곡현 출신이다. 생년미상이나 255년에 사망한다. 곽회의 할아버지 곽전은 대사농을 지냈고 아버지 곽온은 안문태수를 지냈다.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평원부승으로 임명되었다. 조비가 오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곽회를 불러 문화적조에 임명하였다. 후에 승상병조의령사로 전임되었다.

 

조조가 한중을 정벌할 때 종군하였고 조조가 돌아갈 때 하후연을 남겨 유비에게 대항하도록 하고 곽회를 하후연의 사마로 삼았다. 유비가 한중으로 쳐들어오자 곽회는 병에 걸려 출진할 수 없었다. 하후연은 출전하다가 전사하였고 군대 안의 인심은 불안하였다. 곽회는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탕구장군 장합을 내세워 진영을 안정시킨다. 다음 날 유비가 한수를 건너 오려 하자 중과부적이라 생각한 곽회는 진을 치고 적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다. 유비는 의심스러워 하며 한수를 건너 진을 공격하지 않았고 곽회는 진을 고수하고 돌아갈 마음이 없음을 나타냈다. 이 상황을 들은 조조는 곽회를 칭찬하고 임시로 장합에게 부절을 주었고 곽회를 사마로 임명한다.

 

후에 조비가 왕위에 오리자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하고 진서장사로 전임되었다. 또 정강호군을 대행하고 좌장군 장합과 관군장군 양추를 감독하여 산적 정강과 반란을 일으킨 노수의 오랑캐를 모두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관중이 안정되자 백성들은 일을 편안히 할 수 있었다.

 

220(황초 원년) 곽회는 문제가 황제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사자로서 수도를 오는데 도중에 질병이 걸려 걸리는 날짜를 계산하며 요양에 힘썼다. 그러나 그가 입궐하였을 때 이미 잔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비는 그를 옛날에 예를 들며 책망하였고 곽회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변명하였다. 문제는 그의 말을 듣고 칭찬하고 옹주자사를 겸임하도록 했다.

 

안정의 강족 대사 벽제가 반란을 일으키자 곽회가 토벌하여 투항하도록 했다. 매번 강족과 오랑캐가 항복해오면 곽회는 항상 먼저 사람을 보내 그들의 친척관계, 셩별의 많고 적음을 탐문하도록했다. 회견할 때 한 두가지 일로부터 그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었고 심문을 매우 조밀하게 하였으므로 모두 그를 신명이라고 칭했다.

 

228(태화 2) 제갈량이 북벌을 하여 기산에서 나와 마속을 가정까지 파견하고 고상을 열유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장합이 마속을 공격하였고 곽회가 고상의 진영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켰다. 또 농서의 유명한 강족 사람 당제를 포한에서 격파시켰으므로 건위장군의 직위를 더해주었다.

 

229(태화 3) 촉군의 장수 진식이 무도와 음평을 공격해왔다. 곽회는 요격에 나섰지만 제갈량이 직접 나서서 건위로 출진했기 때문에 패배하여 무도와 음평을 빼앗겼다.

 

230(태화 4) 위연과 오의가 강중에 침공했다. 곽회는 비요와 함께 요격하였지만 비요는 남안에서 오의에게 격파되고 곽회도 위연에게 양계에서 격파당한다.

 

231(태화 5) 촉나라가 노성을 공격하러 나갔다. 이때 농우에는 식량이 없었으므로 관중에서 대량 수송해 오도록 상의했다. 곽회는 위임과 은혜로써 강족과 오랑캐 사람을 어루만지며 집집마다 곡식을 내게 하고, 공평하게 수송 노역을 할당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식량은 충분했다. 이에 양무장군으로 전임되었다.

 

234(청룡 2) 제갈량이 마지막으로 북벌을 할 때 사곡으로 공격해 온 제갈량은 난항에서 둔전을 한다. 당시 사마의는 위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곽회는 제갈량의 유인책을 간파하여 제갈량이 반드시 장안 방면인 북원을 공격할 테니 거기를 점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논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말하자 곽회는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마의는 곽회의 의견을 따라 곽회는 곧 북원에 주둔했다. 아직 참호와 보루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 촉군이 대대적으로 다다르니 곽회는 그들을 공격해 촉군을 퇴각시켰다. 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한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제갈량이 서위를 공격할 것이라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량이 서쪽에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위군의 병력이 서쪽에 방비시키게 하려는 제갈량의 계략이며 실제로는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 했다. 그날 밤 곽회의 말대로 촉군이 양수를 공격했는데 위군이 방비를 하고 있어서 촉군은 성을 공략하는 것에 실패한다.

 

240(정시 원년) 강유가 농서로 진격해왔다. 곽회는 곧 진군하여 강중까지 추격하니 강유는 물러났다. 곽회는 곧 강족 미당 등을 토벌하고 저족 3천 부락을 순찰하여 위로하고 그들을 옮겨 관중을 충실하게 되었다. 이 공로로 좌장군으로 승진했다. 양주의 휴도, 호양, 원벽 등 종족 부락 2천여 가구를 이끌고 옹주로 귀속시킨다. 곽회는 상주하여 그들로 하여금 안정군의 고평에서 거주하도록 하며 주민이 되게 하기를 요청했다. 그 후 그들 때문에 서주도위를 설치했다. 전장군으로 바껴 임명되었고 이전과 같이 옹주를 관리했다.

 

244(정시 5) 조상이 촉을 정벌하려고 하자, 곽회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선봉장이 되었다. 곽회는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군사를 적지에서 탈출시켰기 때문에 크게 패배하지는 않았다.

 

246(정시 7) 위장군으로 승진한 강유는 농서로 진격하여 곽회와 하후패를 이기고 돌아온다.

 

247(정시 8) 농서, 남안, 금성, 서평의 각 강족들인 아하, 소과, 벌동, 아차새 등이 서로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강유는 이에 호응한다. 하후패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위시에 주둔했다. 곽회의 군대가 막 적도에 이르렀을 때 논의하는 자들은 먼저 포한을 공격하여 평정한 후에야 내부의 흉악한 강족을 평정할 수 있고, 외보의 적의 음모를 꺾을 수 있다고 했다. 곽회는 강유가 반드시 하후패를 공격해 올 것이므로 풍중으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하후패를 맞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예상대로 강유는 위시를 공격해 왔는데 곽회의 군대를 만나자 강유는 점차 퇴각했다. 곽회는 모반한 강족을 토벌하여 아하와 소과를 베어버렸다. 이에 항복한 자가 1만여 부락이나 되었다.

 

248(정시 9) 아차새등은 하과와 백토의 옛 성에 주둔하면서 황하를 거점으로 하여 위나라 군대에 항거했다. 곽회는 상류의 형세를 보고 비밀리에 하류로 군대를 건너게 하여, 백토성을 점거하고,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치무대가 무위를 포위했지만, 그의 가족들은 서해에 남아있었다. 곽회는 군대를 전진시켜 서해까지 나아가 그들의 물자와 귀중품을 습격하여, 취하려 했는데 마침 돌아오는 치무대와 마주치게 되어 용이의 북쪽에서 교전하여 그를 무찔러 달아나게 했다. 영거라는 흉악한 오랑캐가 석두산의 서쪽에 있었는데 큰 길을 끊어버려 왕의 사신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곽회는 돌아갈 때, 토벌하여 크게 무찔렀다. 강유는 석영으로부터 나와 강천을 따라서 서쪽으로 치무대를 맞이하고, 음평태수 요화를 석중산에 남겨 두어 성을 쌓게 하였고, 패배한 강인들을 거두어 인질로 삼았다. 곽회가 군대를 분산시켜 그들을 취하려 했다. 장수들은 강유의 군세를 서쪽으로 강력한 만족과 이어져 있고, 요화가 요충지를 점거하고 있는데, 우리 편의 군대를 두 방향으로 나누어 대처하는 것은 군대의 세력만 약화시키는 것이고, 전진해도 강유를 제압할 수 없고, 물러나도 요화를 함락시킬 수 없으니 계책이 아니고, 모두 합쳐서 함께 서쪽으로 가는 것만 못하며 아직은 만족과 촉나라가 연견되지 않아 그 안팎이 끊어져 있으니, 이는 연합하여 적을 토벌하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곽회가 말했다.

 

'지금 가서 요화를 취하고, 적이 생각지도 못했는데 출동하면 강유는 반드시 낭패할 것이요. 그리고 강유로 하여금 명령에 따라 분주히 돌아다녀 피곤하게 하는 것이오. 군대는 멀리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호인과 촉나라의 연합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될 것이오. 이것은 하나를 들어 둘을 온전하게 하는 계략이요.'

 

곧 따로 하후패 등을 파견하여 답중까지 강유를 추격하게 했다. 곽회는 직접 군사들을 인솔하여 요화들을 공격하였다. 강유는 과연 달려 돌아와 요화를 구하였으니 모두 곽회가 계산한 것처럼 되었다. 나아가 도향후로 봉해졌다

 

249(가평 원년) 곽회는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로 승진했다. 이해 옹주자사 진태와 함께 계책을 정하며 촉나라 아문장군 구안과 이흠을 항복시킨다.

 

250(가평 2) 곽회는 승진하여 양고후로 봉해지고 식읍이 2780호가 되었는데 300호를 분할하여 한 아들을 정후로 봉했다.

 

251(가평 3) 왕릉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마의에게 진압된다. 곽회의 부인은 왕릉의 누이여서 삼족을 멸한다는 입장 아래 시어사가 그녀를 체포하러 오자 독장 및 강족과 호족의 우두머리 수천 명이 머리를 조아리며 곽회에게 부인을 놓아달라는 상주문을 올리라 하였지만 곽회는 따르지 않았다. 곽회의 부인이 압송되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면서 그녀가 압송되는 길을 막으려 했다. 곽회의 다섯 아들이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면서 곽회에게 청원하자 곽회는 차마 이를 볼 수 없어서 부인을 뒤쫓아 갈 것을 명했다. 이에 수천 명의 기병이 추격하여 부인을 다시 모시고 돌아왔고 곽회는 사마의에게 서찰을 보냈고 사마의는 곽회의 부인을 사면해 주었다.

 

255(정원 2) 곽회가 세상을 떠났고 대장군으로 추증했으며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아들 곽통이 뒤를 이었다. 함희 연간에 다섯 등급 작위를 올렸는데 곽회가 앞 조대에서 공훈이 현저하였으므로 바꿔서 부양자로 봉했다.

 

연의에서는 한중공방전 때 두 번 패한 장합을 감싸는 장면에서 등장하였다. 그 후 대도독 조진의 부도독이 되어 제갈량에게 맞섰지만 패배하는 모습만 보인다. 후에 하후패가 사마의의 전횡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곽회는 이를 토벌하고 하후패는 촉나라로 망명한다. 강족 미당대왕에게 촉의 본진을 안내하도록 해 대승한 전투에서 최후를 맞는다. 혼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곽회가 강유를 향해 화살을 쏘는데 강유는 이것을 받아쥐고 자기 활로 되쏜다. 곽회는 미간에 화살을 맞고 출혈이 심해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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