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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121. 유우 백안

[유우 백안 劉虞 伯安]

 

유우의 자는 백안이며 동해군 담현 출신이다. 생년은 미상이나 193년에 사망한다. 광무제의 아들 동해공왕 유강의 5대 후손이다. 유우는 황제와의 촌수가 멀었으므로 젊은 시절에 현의 하급관리로 시작하였다. 청렴하고 학식이 뛰어나 군으로 불려가 군리가 되었고 군에서도 인정을 받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이 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승진을 거듭하여 관직이 유주자사에 까지 이르렀다. 유우는 민정에 능하고 온후하고 사려가 싶었으며 명성과 지위에 의지해 자신을 높이지 않고 항상 겸손하며 검약한 태도를 지켰으므로 영내의 백성들을 비롯해 이민족에게도 큰 신뢰를 얻었다. 이후 임기가 지나자 조정에서는 유우를 중앙으로 불러 상서령, 광록훈으로 거듭 임명했고황실의 종친으로서 예를 갖추었다고 하여 종정으로 바꿔 임명했다.

 

이후 변장과 한수가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유우는 오환족 기병 3천명을 이끌고 활약하였다. 태산 태수 장거와 장순이 반란을 일으키고 오환의 여러 부족들이 연합하여 유주의 주성인 계를 함락시키고 여러 태수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손찬이 반격을 가해 장거를 격파했지만 관자성에서 포위당하여 수많은 군사들을 잃어 막지 못하였다. 이에 188년 조정에서 유우를 유주목으로 임명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유우는 계에 도착하자, 먼저 주둔한 병사들을 물리게 하고 은혜와 신의를 넓게 펼치는 것에 힘썼으며 사절을 보내 이해를 설명하고 장순의 수급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 결과 오환의 구력거 등이 유우에게 귀순해 왔고 장거 장순의 무리에게도 상을 내리며 회유책을 펼쳤다. 장거, 장순은 세력을 잃고 선비족에게 달아나다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공로로 조정에서는 유우를 태위에 임명하고 양비후로 봉했지만 유우는 사양한다. 그 후 조정을 장악한 동탁이 유우를 대사마로 임명했다.

 

190 (초평 원년)에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191년에 연합군의 맹주 원소는 기주자사 한복 등을 비롯해 유주목 유우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다. 원소는 유우를 구심점으로 하여금 연합군을 단결시켜 동탁을 토벌하고 천하의 안정을 찾으려 하였다. 유우는 거절하였고 원소는 거듭 유우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하였지만 유우가 단호하게 계속 거절하여 원소도 포기하게 된다.

 

유우는 수하인 전주와 선우은을 장안으로 보내 헌제를 알현하게 하였다. 헌제는 크게 기뻐하며 장안에 있던 유우의 아들 유화를 유우에게 보내 유우가 자신을 구원하라는 칙서를 내렸다. 유화가 원술의 영지를 지날 때 유화는 원술에게 헌제의 뜻을 전하였는데 원술은 유우를 이용하여 외부 원조를 받으려고 유화를 억류한다. 원술은 유화를 협박하여 유우의 군대를 부르려 하는 편지를 쓰게 하여 유우에게 보냈는데 유우는 편지를 받고 수천 기병을 공손찬에게 주었다. 공손찬은 원술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제지하려 하였으나 유우는 듣지 않았고 공손찬은 원술이 사실을 알고 원망할까 두려워 하여 사촌 동생 공손월에게 수천 기병을 주어 원술과 손을 잡고 비밀리에 원술에게 부탁하여 유화의 군사 지휘권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 일로 유우와 공손찬의 사이는 더욱 나빠지게 된다.

 

192 (초평 3) 공손찬과 원소의 대립이 심해져 원소를 공격하였지만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공손찬은 원소에게 계속 패배하였지만 오히려 군사를 이끌고 계속 공격하였다. 유우는 싸움을 거듭하며 주위를 피폐하게 만드는 공손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말렸지만 공손찬은 따르지 않았다. 공손찬의 상관이었던 유우는 공손찬의 녹봉과 양식을 줄이고 조정에 상주하여 공손찬의 군사행동을 허락치 않도록 했는데 공손찬은 이 일로 유우의 조치의 대노하였다. 이에 공손찬은 유우의 통제를 더욱 따르지 않았다. 공손찬은 원소에게 거듭 패한 후 유주의 주성 계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주둔하였는데 유우는 공손찬과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거듭 만나려 하였지만 번번히 거부당한다.

 

유우는 공손찬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공손찬의 군세가 흐트러져 있는 틈을 타 선공을 가한다. 하지만 유우는 군사 지휘가 서툴렀고 백성들의 피해를 걱정하다 보니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역공을 당해 대패하여 거용으로 퇴각했으나 가족들과 함께 공손찬에게 붙잡히고 만다. 193년에 조정에서 단훈을 사자를 보내 유우와 공손찬의 벼슬을 높여주었지만 공손찬은 단훈을 협박하여 유우가 원소와 손을 잡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계성 저자거리에서 유우 일가를 처형하고 유우의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백성들은 유우의 죽음을 슬퍼하고 몇몇 관리들은 일부러 유우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공손찬을 비난하다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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