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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122. 가후 문화

[가후 문화 賈詡 文和]

 

가후의 자는 문화이고 무위고 고장현 출신이다. 147년에 태어나 223년에 사망한다. 가후는 어렸을 때 사람들은 몰라보았지만 한양의 염충만이 그를 남다르게 여겨 가후에게는 장량이나 진평과 같은 기이함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가후는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이 되었다. 후에 병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견현에 이르렀을 때 반란을 일으킨 저족에게 붙잡혔다. 가후는 저족에게 나는 단공의 외손자이니 나를 따로 매장해라. 우리 집은 반드시 후한 예로 나를 살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태위 단경이 이전에 오랫동안 변방의 장수를 지내어 그 위세가 서쪽 땅에 진동하였다. 가후는 거짓으로 단경의 외손자라 한 것인데 저족은 감히 가후를 헤치지 못하고 그와 맹약을 맺고 돌려보내 주었으며 그 외 붙잡혔던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

 

동탁이 조정을 장악할 때 가후는 태위연 신분으로 평진도위가 되었고 후에 토로교위로 옮겨졌다. 동탁의 사위 중랑장 우보가 섬에 주둔하였을 때 가후는 우보와 함께 있었다. 동탁이 사망하고 우보 또한 죽자 동탁의 무리였던 이각, 곽사, 장제 등은 두렵고 무서워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가후는 그들을 만류하고 서쪽으로 가서 군대를 정비하여 장안을 공격할 것을 권하였고 사람들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이각은 장안을 공격하였다.

 

가후를 좌풍익에 임명하고 이각은 가후를 제후에 봉하려 하였지만 가후는 거절하였다. 이각은 가후를 상서에 제수시켜 관리들을 선발하게 하였다. 이각은 가후를 신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 하였다. 이각과 곽사가 서로 반목하여 장안에서 다투어 혼란스러울 때 가후는 이들과 거리를 두면서 황제와 대신들을 보호하였다.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하자 가후는 화음에 주둔해 있던 단외에게 의탁하였다. 단외는 가후에게 자신의 군대를 빼앗길까 두려워 하였지만 극진히 예의를 갖추어서 가후가 점차 스스로 불안을 느끼게 하려 하였다. 당시 장수가 남양에 있었는데 가후는 은밀히 장수와 교류하여 장수에게 의탁한다. 조조가 장수를 정벌하러 왔을 때 장수는 조조에게 항복하였지만 다시 배반하여 가후의 계략으로 조조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크게 승리했다. 이 전투로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 전위 등을 죽였다. 또한 가후는 장수와 유표를 화친시키고 조조가 두 번째로 침공해 왔을 때 조조의 위격전살지계를 파악하고 패퇴시킨다. 조조가 퇴각하자 장수가 추격하려 하였지만 가후는 만류하였다. 하지만 장수는 추격하다가 패배하였는데 가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다시금 가후의 책략을 받아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다시 추격하였는데 이번엔 승리해서 돌아왔다.

 

이후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할 때 원소는 사자를 보내 장수와 손을 잡으려 하였다. 장수는 허락하려 하는데 가후는 오히려 원소의 사자에게 거절하여 돌려보낸다. 가후는 장수에게 원수지간인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였고 장수는 가후의 말을 듣고 항복하였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였고 가후를 집금오에 임명하고 도정후로 봉하였다. 원소가 관도에서 조조를 포위했을 때 양식이 떨어지려 하였는데 망설이는 조조의 결단을 촉구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하북이 평정되어 조조가 기주목을 겸임할 때 가후를 태중대부로 옮겼다.

 

조조가 형주를 정벌한 후 가후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정을 취한다면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도 손권을 항복시킬 수 있다 하였지만 조조는 듣지 않았고 결국 유비, 손권 연합군에게 패배한다. 한수와 마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이간책을 쓸 것을 건의하였고 한수에게 서신을 보낼 때 일부러 군데군데 글자를 지운 편지를 보내 마초를 의심하게 하여 사이를 벌려놓고 기습하여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조조가 조비와 조식 사이에서 후계자를 두고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가후는 원소와 유표를 예시로 조조에게 말하니 조조는 곧바로 조비를 태자로 임명하였다. 가후는 스스로 조조의 오랜 신하가 아니라 여겼지만 계책과 모략이 깊고 뛰어났기에 다른 사람들의 시기를 받는 것이 두려워 항상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지켰다. 집에 돌아와서도 사사로운 교분을 맺지 않았고 자녀들을 혼인 시킬 때도 권문 세족과 혼인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논하는 자들은 가후에게로 왔다 한다.

 

220년에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왕위를 잇고 이어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자 가후는 태위로 임명하고 위수향후로 봉해진다. 조비가 가후에게 촉과 오나라 중 어느 곳을 먼저 토벌할지에 대해 묻자 가후는 군대를 일으키는 것보다 내실을 다질 것을 권하였지만 조비는 듣지 않고 군대를 일으켰다가 강릉에게 크게 패배해 병사들만 잃었다. 223년에 가후가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시호를 숙후라 하였다. 장남 가목이 후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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