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198. 왕랑 경흥

[왕랑 경흥 王朗 景興]

 

왕랑의 자는 경흥이며 동해군 담현 출신이다. 생년은 미상이나 228년에 사망한다. 왕랑은 경전에 통달했으며 낭중 벼슬을 받았다가 다시 치구현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태위 양사를 스승으로 섬겼고 양사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복상의 예를 다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공부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서주자사 도겸은 왕랑을 관찰하고는 무재로 천거하였다.

 

당시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고 장안으로 천도하였는데 왕랑은 도겸의 치중이 되어 별가 조욱과 더불어 도겸에게 천자를 구하고 사신을 보내 왕명을 받들고 계승할 것을 진언하였다. 도겸은 조욱에게 상주문을 받들고 장안으로 가도록 하였고 헌제는 도겸의 마음을 가상히 여기고 도겸을 안동장군으로 임명하였다. 더불어 조욱을 광릉 태수로 삼았고 왕랑을 회계 태수로 임명하였다.

 

이후 손책이 장강을 넘어 강동을 평정할 때 왕랑의 공조 우번은 힘으로는 대항할 수 없으니 피할 것을 진언하였는데 왕랑은 자신이 한나라 왕실의 관리이므로 응당 성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왕랑은 군사들을 이끌고 손책과 싸웠지만 패배하여 바다에 표류하다가 동야에 이르렀다. 손책은 동야까지 추격하여 왕랑을 격파하였고 왕랑은 손책에게 나아갔다. 손책은 왕랑이 유학의 교양이 바른 사람이라 여겨 문책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왕랑은 비록 유랑과 곤궁한 생활을 하여 아침에 그날 저녁을 계획하지 못할지라도 친척과 친구를 수용하여 위로하고 나눌 것이 많든 적든 간에 도의에 기초하여 행동하였으므로 매우 빛났다. 조조가 상소를 올려 왕랑을 불러 들이니 왕랑은 곡현으로부터 장강과 바다를 전전하여 몇 년만에 도착하였다. 왕랑은 간의대부, 참사공군사로 임명되었다.

 

위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군좨주가 되어 위군 태수를 겸하였고 소부, 봉상, 대리로 승진하였다. 왕랑은 일을 처리하면서 관용이 있었고 의문이 있는 죄상에 대해서는 가볍게 처리하였다. 종요는 분명하게 살펴 합당하게 법을 집행하였으며, 안건을 잘 심사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어사대부로 승진하였고 안릉정후에 봉해졌다. 왕랑은 조비에게 상주하여 백성을 양육하고 형벌을 살필 것을 진언하였다.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왕랑은 사공에 임명되고 악평향후로 봉해졌다. 당시 조비가 항상 수렵을 하러 나가자 왕랑은 사냥을 멈추고 백성들을 돌볼 것에 대해 상소문을 올렸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위나라에 대하여 번국으로 일걸으나 유비와는 전쟁을 하였는데 조비는 오와 촉을 칠 것을 의논하였다. 왕랑은 승패가 빨리 결정될 수 없고 비도 많이 내리고 있어 군대를 무리하게 움직여서 안된다고 하였다. 조비는 왕랑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황초 연간에 공경들에게 군자를 추천하도록 하였는데 왕랑은 광록대부 양표를 추천하고 병을 핑계 삼아 양표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조비는 양표를 위해 이졸을 두고 관위를 삼공 다음으로 정하였다. 조비는 왕랑에게 사퇴하지 말 것을 꾸짖었고 왕랑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손권이 아들 손등을 보내 조비를 가까이서 모시게 하려 하였지만 오지 않았다. 이에 조비가 허창으로 와서 대대적으로 오나라를 정벌하려 하였지만 왕랑은 이를 말렸다. 조비는 듣지 않고 출병하였지만 결국 장강 앞에서 그냥 돌아오고 만다.

 

조예가 즉위하자 왕랑은 난릉후로 승진하여 봉해졌으며 왕랑은 사신으로서 업성으로가 문소황후의 능묘를 참배하고 백성 중에서 생활이 넉넉치 못한 자들을 만났다. 이 때 마침 궁실을 건축하고 꾸몄는데 왕랑은 백성들을 돌볼 것을 상소문으로 올렸다. 왕랑은 사도로 자리를 옮겼고 228년에 사망하였다. 시호를 성후라 하였으며 아들 왕숙이 뒤를 이었다.

'역사 > 삼국지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지 인물 200. 하후박  (0) 2016.03.11
삼국지 인물 199. 유엽 자양  (0) 2016.03.11
삼국지 인물 197. 화흠 자어  (0) 2016.03.11
삼국지 인물 196. 유훈 자대  (0) 2016.03.11
삼국지 인물 195. 왕충  (0) 201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