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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197. 화흠 자어

[화흠 자어 華歆 子魚]

 

화흠의 자는 자어이며 평원군 고당현 출신이다. 157년에 태어나 231년에 사망한다. 고당은 제 땅에 유명한 도시인데 의관을 갖춘 사람 중에서 저잣거리나 향리로 놀러 다니지 않은 자가 없었다. 화흠은 낮은 자리에 있는 관리였지만 쉴 때마다 관청을 나와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화흠은 의를 논할 때 공평함을 견지하며 시종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상하게 하지 않았다. 같은 군 사람인 도구홍 또한 이름이 알려졌는데 스스로 총명함과 식견이 화흠을 뛰어넘는다고 생각했다.

 

185 (중평 2) 당시 조정은 환관들과 외척들로 인해 혼란스러웠는데 왕분은 허유, 주정, 진일,양해 등의 호걸들과 더불어 영제를 폐위시키고 합비후를 옹립할 계획을 세운다. 조조에게도 권유하였지만 조조는 거절하였고 왕분은 화흠, 도구홍 등에게도 거병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도구홍은 가담하려 하였지만 화흠은 무릇 군주를 폐위시키는 큰일은 이윤이나 곽광 같은 현신 들도 하기 어렵소, 왕분은 성격이 조잡하고 무용도 없으므로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화가 장차 가족에게까지 미칠 것이오. 그대는 가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도구홍은 화흠의 말을 듣고 가지 않았다. 화흠의 예상대로 왕분은 실패하였고 도구홍은 감복하였다.

 

화흠은 효럼으로 천거되고 낭중을 역임하였지만 병이 들어 관직을 떠났다. 영제가 붕어한 후 하진이 조정을 장악하였는데 하남의 정태와 영천의 순유, 화흠 등을 불렀다. 화흠이 부름을 받고 오자 상서령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십상시의 난으로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고 각지의 군웅들이 반동탁 연합군을 맺자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화흠은 지방으로 나가 하규의 영이 되기를 원했지만 병으로 가지 못하고 결국에는 남전에서 남양으로 갔다.

 

화흠이 남양에 있을 때 원술은 양성에 있었는데 화흠을 남겨두었다. 화흠은 진군하여 동탁을 토벌하자고 원술을 설득하였지만 원술은 듣지 않았다. 화흠은 원술을 버리고 가려고 했지만 마침 헌제가 태부 마일제를 보내 관동을 안정시키도록 하였고 화흠을 불러 속관의 자리를 주었다. 화흠은 동쪽으로 가 서주에 이르렀고 조서를 받아 그 자리에서 예장태수로 임명되었다.

 

화흠은 정치를 청정하고 혼란스럽지 않게 했으므로 그곳 백성들과 관리들은 모두 감복하여 그를 아꼈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할 때 화흠은 손책의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두건을 쓰고 받들어 맞이하였다. 손책은 그가 덕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상빈의 예로 접대했다. 후에 손책이 사망하고 조조는 헌제에게 상주하여 화흠을 불러들이려 하였다. 손권은 보내지 않으려 하였지만 화흠은 조조와의 교류를 통해 이익을 얻을 것을 말하였고 손권은 기뻐하며 화흠을 조정으로 보냈다.

 

화흠이 떠날 때 그를 전송하는 빈객과 친구들이 1000여 명이나 되었고 그에게 수백 금을 주었다. 화흠은 모두 거절하는 것이 없었지만 몰래 각기 제목을 달아 표시해 두고는 떠나갈 때가 되자 물건을 모두 한 곳에 쌓아 놓고 떠났다. 화흠이 도착하자 의랑으로 임명되었고 사공의 군사일에 참여하고 조정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 벼슬이 바뀌어 시중이 되었고 순욱을 대신하여 상서령으로 임명되었다.

 

조조가 손권을 정벌할 때 화흠을 군사로 삼아야 한다고 상주하였고 위나라가 건국될 때 어사대부가 되었다. 후에 조비가 왕위에 올랐을 때 상국 벼슬을 받았으며 안락정후로 봉해졌다가 조비가 황제가 되었을 때 사도로 임명되었다. 화흠은 평소 청렴하여 봉록과 받은 하사품은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집에는 곡식도 얼마 없었다. 일찍이 공경들이 모두 관청 소속의 노비를 하사받았는데 화흠만은 여자들을 풀어 주고 시집 보냈다. 조비는 탄식한 후 특별히 화흠에게 어의를 내리고 아울러 그의 처자와 집안 남녀에게 모두 의복을 지어주었다.

 

황초 연간에 공경들에게 군자를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화흠은 관녕을 천거하였고 불러들여 안거에 앉혔다. 조예가 즉위한 후 화흠은 박평후에 봉해졌고 벼슬이 바뀌어 태위가 되었다. 화흠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며 관녕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하였지만 조예는 허락하지 않았다. 태화 연간에 조예는 조진을 파견하여 자오도를 통해 촉나라를 토벌하도록 하고 자신은 허창으로 갔다. 화흠은 상소를 올려 내정에 신경 쓸 것을 진언하였다. 당시 가을비가 많이 내려 조진에게 귀환할 것을 명하였다. 231 (태화 5)에 화흠이 사망하였고 시호를 경후라 하였다. 아들 화표가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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