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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199. 유엽 자양

[유엽 자양 劉曄 子揚]

 

 

 

 

유엽의 자는 자양이며 회남군 성덕현 출시니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광무제의 아들 부릉왕 유연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유보이고 어머니는 수씨인데 유환과 유엽을 낳았다. 유환이 9세이고 유엽일 7세 일 때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였는데 임종하면서 너희 부친을 시중드는 계집이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헤치는 성품을 갖고 있다. 내가 죽은 후에 반드시 우리 집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 염려된다. 너희가 장성하여 능히 그를 없애 버린다면 나에게 여한이 없겠다라고 유언하였다.

 

유엽이 13세 때 유환에게 어머니의 유언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고 유엽은 즉시 방으로 들어가 시비를 죽이고는 문을 나와 어머니의 묘에 참배하였다. 집안사람들은 크게 놀라 유보에게 알렸는데 유보는 노하여 유엽을 쫓게하였다. 유엽은 집으로 돌아와 사죄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기신 말씀이므로 감히 함부로 한 행동의 벌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유보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결국 아들의 죄를 묻지 않았다.

 

여남군의 허소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이름이 알려져 있었는데 전란을 피해 양주까지 피난을 왔다. 허소는 유엽을 보고 세상을 보좌할 인물이라 하였다. 양주의 선비들은 대부분 경솔하고 의협을 좋아했으며 오만하고 교활했다. 정보, 장다, 허건과 같은 무리들은 각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정보가 가장 날쌔고 과감하며 재능과 힘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였으므로 사람들에 의해서 거리낌을 받았다. 정보는 백성들을 내몰고 핍박하여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게 했다. 유엽이 높은 가문의 명사였기 때문에 유엽을 핍박하여 그를 대신해 이 계획을 주도하게 하려고 하였다. 유엽은 당시 20세 남 짓이었는데 마음속으로는 내심 이 점을 우려했으나 기회가 없었다. 때마침 조조가 사자를 파견하여 주로 불러 몇 가지 사정을 물었다. 유엽은 사자 앞에 나아가 주에서 일어난 이러한 사건의 형세를 논하고는 함께 돌아가 몇 일 머물기를 권했다.

 

정보는 과연 수백 명의 백성을 거느리고 소고기와 술로 사자를 대접하러 나왔다. 유엽은 집안 하인들과 그 무리들을 좌중의 문 밖에 있도록 하고 밥과 술을 차려 주었다. 유엽 자신도 정보와 함께 그의 내당에 들어 술자리에 참석하였다. 유엽은 비밀리에 건장한 사람들을 모으고는 자신이 술을 따르는 틈을 타서 정보를 베어 버리도록 지시하였다. 정보는 성품이 술을 조하하지 않아 사자를 만났을 때 정신이 매우 멀쩡하여 술잔을 돌리는 틈을 이용하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유엽은 이로 인하여 직접 칼을 차고 정버를 죽이고는 그이 머리를 베어 그가 데리고 온 군대에게 호령하며 말했다. “조공의 명령이 있으니 감히 함부로 행동하는 자는 정보와 마찬가지로 다스리겠다무리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군영으로 달아나 돌아갔다.

 

군영에는 정병 수천 명을 감독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들이 혼란을 일으킬까 근심스러웠다. 유엽은 즉시 정보의 말을 빌려 타고 집안 하인들을 몇 명 데리고서 정보 군영의 문 앞에 가서 그 두목에게 소리쳐 화복을 비유하여 설명하니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고 문을 열고 유엽을 받아들였다. 유엽은 그들을 달래주고 편안하게 하니 모두들 기뻐하며 복종하여 유엽을 주인으로 추대하였다. 유엽은 한나라 왕실이 점점 쇠미해 가는 것을 보며 자신이 한나라 왕족의 지파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사사롭게 병사들을 거느리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거두어들인 부하들은 여강 태수 유훈에게 주었다. 유훈은 병사들을 인계 받았을 때 병사들은 장강과 회수 사이에서 막강하였다. 손책은 그것을 매우 싫어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말을 낮추고 폐백을 후하게 하며 글로써 유훈을 설득하였다. 유훈은 손책의 계략에 빠져 조조에게 달아났다.

 

조조가 수춘에 이르자 당시 여강군의 경계에 진란이라는 산적이 수만 무리를 데리고 험준함을 근거로 삼아 막고 있었다. 편장군을 보내어 주살하도록 했으나 사로잡을 수 없었다. 조조가 휘하 장수들에게 다그쳐 묻자 공격하기가 어려우니 내버려 둘 것을 진언하였다. 이 때 유엽은 진란을 공격하여 위세를 보일 것을 조언하였고 조조는 웃으며 이를 받아들였고 진란을 토벌하고 사공창조연으로 삼았다.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토벌할 때 유엽을 전임시켜 주부로 임명하였다. 한중에 이르렀을 때 산이 험하여 오르기 어려웠고 군량미도 거의 바닥이 났다. 조조는 퇴각을 하려 하면서 후방의 모든 군대를 감독하여 차례차례 내보내게 했다. 유엽은 장로를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는 식량 수송로를 모두 끊어 버렸다. 군대가 비록 빠져 나왔지만 모두 목숨을 보전한다는 보장이 없어 말을 달려 조조에게 공격할 것을 진언하였다. 조조는 군대를 나아가게 하고 궁수를 많이 뽑아 장로의 진영에 활을 쏘았다. 장로는 달아났고 한중은 평정되었다. 유엽은 한중에서 돌아온 후에 행군장사가 되어 영군의 직책을 겸하였다.

 

220 (연강 원년) 촉나라 장수 맹달이 군대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조비는 그를 중시하여 신성태수로 삼고 산기상시를 더하였다. 유엽은 맹달이 배신할 수 있어 국가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 하였지만 조비는 듣지 않았고 조비 사후에 맹달은 반란을 일으켰다. 황초 원년에 유엽을 시중으로 삼고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했다.

 

손권이 관우를 주살한 후에 유비가 관우를 위하여 오나라에 보복할 지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모두들 촉나라의 뛰어난 장수는 관우 밖에 없기 때문에 출병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지만 유엽만이 관우를 위해 오나라에 복수할 것이라 하였다. 예상대로 유비는 관우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고 오나라는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유비군에 대응하였다. 또한 위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번국이라 칭하니 모든 신하들은 축하하였지만 유엽만은 손권이 어려운 상황이라 신하라고 칭하는 것일 뿐 속으로는 신하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지 오래이며 곤궁함을 틈타 오나라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였다. 유비의 군대가 패퇴하자 오나라는 위나라에 대한 예의와 경의를 그만두었다. 이에 조비가 오나라를 징벌하려 하자 유엽은 이번에 오나라를 공격할 것을 말렸지만 조비는 듣지 않았다.

 

224 (황초 4) 조비는 광릉의 사구까지 행차하여 형주와 양주의 모든 군대가 진격하도록 명하였다. 조비는 손권이 직접 항복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모든 신하들은 손권은 두려워 항복할 것이라 하였지만 유엽만은 반드시 군대를 이끌고 후방에 남아서 진격도 후퇴도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손권은 몇 일이 지나도 항복하러 오지 않았고 결국 군사를 후퇴시켰다. 회군하기 전에 조비는 유엽의 계책이 옳았다고 하였다.

 

조예가 즉위한 후 동정후에 승진하여 봉해진다. 요동 태수 공손연이 숙부 공손공의 직위를 빼앗자 사절을 보내 상황을 상주하도록 하였다. 유엽은 공손연을 주살할 것을 생각하고 군대를 보내 은혜와 상을 베풀어 항복을 유도할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나중에 공손연은 모반하였다. 유엽은 조정에 있을 때 당시 사람들과 전혀 교류를 하지 않았고 232년에 병이 있어서 태중대부로 제수되었다. 얼마 지나서 대홍려가 되었으며 자리에 있은지 두 해만에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태중대부가 되었다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경후라 하였고 아들 유우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