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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칼럼

제갈량의 공성계는 사실일까?


제갈량의 공성계는 사실일까?




공성계(空城計).


36계(計) 가운데 패전계(敗戰計) 제32계로 원문은 이러하다. 


'虛者虛之,疑中生疑,剛柔之際,奇而復奇'


즉, 능력이 부족할 때 의도적으로 허점을 드러내 적으로 하여금 의심과 혼란에 빠지게 하여 전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심리계책을 의미한다.


춘추시대(기원전 770년 ~ 기원전 481년), 

초(楚)나라의 공자 원(公子 元)이 군사력이 약했던 정(鄭)나라로 쳐들어오자 정나라의 숙첨(叔詹)이 동맹국인 제(齊)나라에서 구원병이 올때까지 시간을 끌기위해 성문을 활짝 열고 성내에 있는 군사들을 모두 매복 시켜 보이지 않게 한 다음 거리의 가게들은 문을 열어 장사를 하게 하고 백성들도 거리로 나다니되 절대로 당황해하는 빛을 보이지 않도록 하자 이를 보고 의심스럽게 여긴 초나라가 공격을 주저하다 제나라의 구원병 소식에 철군한 것을 그 시초로 본다.




그렇다면 흔히들 공성계 하면 떠올리는 제갈량의 공성계는 어떤 내용이며, 그것은 진실일까? 

우선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갈량이 촉나라 군대를 양평관에 주둔시키고, 대장군 위연(魏延)과 왕평(王平) 등으로 하여금 위(魏)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할 때의 일이다. 


군대를 모두 다른 곳으로 보냈기 때문에 제갈량이 주둔하고 있는 성에는 병들고 약한 일부의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이때 위의 대도독 사마의(司馬懿)가 1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성으로 쳐들어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제갈량은 군사들로 하여금 성 안의 길목을 지키게 하고, 성문을 활짝 열어둔 채 20여 명의 군사를 백성들로 꾸며 청소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성 밖에서 눈에 잘 띄는 적루(敵樓)의 난간에 기대앉아 웃음 띤 얼굴로 한가롭게 거문고를 뜯었다.


대군이 몰려와도 아무 일 없는 듯 청소를 하고 있는 백성들과 거문고를 뜯고 있는 제갈량을 본 사마의는 제갈량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몰라 군사를 거두고 물러가 버렸다.


다음 날 제갈량은 박장대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마의는 나를 아주 주의깊은 사람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복병이 있는 줄 알고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제갈량의 공성계] 



     

이는 제갈량이 신중하며, 승산이 없는 것에 모험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사마의가 제갈량이 허장성세를 할리가 없으며 매복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에 빠져 군사를 물린 것으로 상대가 사마의가 아닌 산적이었다면 그대로 제갈량의 목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상대를 서로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고도의 심리전인 것이다.


배송지는 곽충3사의 기록을 인용하여 정사 삼국지 제갈량전에 이 일화를 주석으로 적어놓았고 소설인 연의에서도 이 극적인 일화를 '제갈량이 거문고를 뜯어 사마 중달을 물리쳤다'는 의미의 탄금주적(彈琴走敵)으로 묘사해 놓았다. 


곽충3사의 기록을 토대로 정사에 주석으로 실려있는 이야기이니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사에 주석으로 공성계 일화를 적어넣은 배송지가 그에 대한 반박도 같이 적어놓은 것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반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사마의가 양평관에 있을리가 없다.


당시 사마의는 형주도독으로 완성에 있었으므로 한중에 있는 양평에 가있을 수가 없다.

사마의는 조진 사후가 되어서야 관중으로 가서 제갈량과 겨룬다.


2. 제갈량이 병약한 병사 소수만 있는 성에 남을리가 없다.


제갈량은 위연을 신뢰하지 않아 자오곡계 조차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위연에게 주력 대군을 맡기고 자신은 병약한 소수의 병사만 있는 성에 남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3. 사마의가 철군을 할 이유가 없다. 


곽충의 기록대로 사마의에게 15만의 대군이 있었다면 설령 복병이 있다 하더라도 진을 치고 신중을 기하면 되는 일인데 철군까지 할 필요가 없다.




중국의 이중톈(易中天) 교수 또한 그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제갈량의 공성계는 허구라고 이야기 했다.

 

1. 매복이 두려웠다면 정탐병을 보내 파악할 수 있었다.


2. 제갈량의 거문고 소리에 흐트러짐이 없음을 분간할 수 있는 거리였다면 어째서 활로 제갈량을 맞추지 않았는가?


3. 성을 포위만 하고 공격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을 굳이 철군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듯 공성계를 주석으로 달아놓고 거짓이라고 직접 반박한 배송지의 이야기를 보나 여러 정황 상 제갈량이 사마의를 상대로 양평관에서 사용한 공성계 일화는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연의에 와서 제갈량과 사마의의 라이벌 구도와 극적 연출을 위해 그려지고 영화 등 각종 미디어에서도 빠지지 않는 이야기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제갈량의 일화 중에서도 손을 꼽는 일화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