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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칼럼

제갈량이 유비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제갈량이 유비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삼고초려 (三顧草廬)


풀이하면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제갈량을 맞이하기 위해 유비가 제갈량의 집을 세 번 찾아갔던 일화로 널리 익숙한 고사성어다.


이는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당시 촉황제였던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에도 묘사되어있다.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로 남양의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 황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셔서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하였사옵니다.』


일반적으로 제갈량이 유비를 따르게 된 이유가 초야에 묻혀 농사나 짓고있던 자신을 세 번이나 직접 방문한 것에 감격했기 때문으로 알고있으나 제갈량이 단순히 그러한 이유만으로 유비를 따랐던 것일까?




야심가 제갈량


제갈량은 초야에 묻혀 지낼 적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스스로를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견주었다.


관중은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명재상으로 뛰어난 내정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했고, 악의는 연(燕)나라의 명장이자 현자로 뛰어난 전술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던 희대의 영웅들이었다.


제갈량 스스로가 관중과 악의에 자신을 비유함으로써 두 사람을 롤모델로 삼았음과 동시에 영웅들을 자신과 견줌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어필하여 그 가치를 높이려 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무식하고 정세에 어두운 사람이 저런 대담한 행동을 취할리도 없고 설령 취한다 하더라도 비웃음만 사는 일로 끝나겠지만 제갈량은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정도로 학문이 깊고 정세와 병법에도 밝았으며 이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유비의 세번째 방문때 천하삼분지계(융중대)를 상세히 제시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번잡한 세상에 출사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 병법을 공부하고 정세를 읽으며 천하삼분지계를 완성할 방안을 치밀하게 구상해 놓고 준비하고 있었을리가 만무하다. 


그는 자신이 구상한 위업을 달성할 군주가 나타나 세상에 나설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하필 유비였나?


당시의 정세로 보면 강대한 세력과 수많은 뛰어난 인재를 보유하고 있던 위(魏)나라의 조조가 대업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 위해서는 순욱, 곽가, 정욱 등의 뛰어난 인재들 속에서 그들보다 더욱 두각을 드러내야만 빛을 볼 수 있다는 말로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제갈량이 승상이 된 후 자신과 동문수학 했던 동무들이 위나라에서 중간급 관리직을 하고있는 것을 알고서는 '아직도 그러한 위치에 밖에 오르지 못하다니 위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인재가 있다는 것인가' 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더욱이 인재를 중히 여긴다고는 하지만 의심이 많고 필요에 따라서는 잔인한 면모 또한 서슴치 않고 보여주는 조조보다는 백성들의 신망이 높고 한황실의 부흥과 천하만민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운 유비가 자신의 가치관과 더 부합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강동의 손권의 경우에도 많은 중신들이 이미 포진되어 있는 상태였고, 더욱이 손권 스스로가 강동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천하를 도모한다는 강한 의지가 부족했다.


이러한 정황 상 비록 유비의 당시 처지가 다른 세력만 못했지만 자신을 중용하여 재능을 마음 껏 펼치고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유비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렇듯 제갈량은 단순히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복하여 그를 따른 것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준비하며 자신이 임관하게 되면 어떤 위치에서 얼마나 능력을 펼칠 수 있는지, 또 군주와 자신의 가치관이 얼마나 부합되는지 치밀하게 계산하여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내린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