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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318. 장억 백기


[장억 백기 張嶷 伯岐]




장억의 자는 백기이며 파군 남충국 출신이다. 생년 미상이나 254년에 사망한다. 약관의 나이에 현의 공조가 되었다. 유비가 촉을 정벌할 때 산적들이 현을 습격하자 현장은 가족을 버리고 도망지만 장억은 현장의 부인을 등에 업고 재빨리 빠져나가 구출한다. 이로 인해 장억은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주에서 불러 종사로 삼았다.

 

227(건흥 5)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했을 때 광한, 면죽의 산적인 장모가 군자금을 훔치고 관리와 백성을 겁주어 재물을 빼앗았다. 장억은 도위 신분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러 갔다. 장억은 그들이 새처럼 흩어져 싸우므로 잡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거짓으로 화친을 맺고 시간을 정해 술자리를 열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장억은 직접 수하의 사람들을 이끌고 장모 등 50여 명의 목을 베어 산적 우두머리를 모두 없앴다. 그리고 장억은 남은 무리들을 찾아내어 열흘 만에 산적들을 평정한다.

 

후에 장억이 중병에 걸렸는데 집이 가난하였다. 광한 태수인 하지는 인정이 후하기로 이름이 나있었는데 장억은 예전에는 그와 사이가 멀었지만 직접 수레를 타고 하지의 집으로 찾아가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는 자신의 재산을 주어 장억을 치료해주었고 몇 년이 지나자 병이 다 나았다. 장억은 하지를 친구로 삼고 매우 신뢰하였다.

 

장억은 아문장으로 임명되어 마충에게 예속되었다. 북쪽으로 문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족을 토벌하고 남쪽의 네 군의 만족을 평정하였는데 대체로 장억이 세운 작전에 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236(건흥 14) 무도의 저왕 부건이 항복을 요청해왔다. 조정에서는 장위를 보내 맞이하도록 했는데 약속한 날이 지나도 오지 않자 대장군 장완은 미우 걱정했다. 장억은 필시 부건과 그의 동생이 항복에 대해 서로 분열이 난 것이라고 평하였고 예상대로 부건의 동생은 저족을 이끌고 위나라로 갔고 부건만이 투항하러 왔다.

 

일전에 월수군에서 제갈량이 고정을 토벌한 이후에도 수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이 태수 공록과 초황을 죽였다. 이때부터 태수는 감히 군에 가지 못하고 군으로부터 800여리 떨어진 안상현에 머물렀으므로 군의 역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당시 월수군을 찾기 위해 장억을 월수태수로 임명하였다. 장억은 수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군으로 가서 은혜와 신의로써 수족들을 이끄니 모두 복종하여 항복하고 귀순하였다.

 

북쪽 국경의 촉마족은 용맹하기로 유명했는데 그들은 촉나라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있었다. 장억은 곧바로 가서 그들을 토벌하고 우두머리 위랑을 사로잡았다가 또 풀어 주며 깨우쳐주고 나머지 사람들을 회유하도록 했다. 장억은 조정에 표를 올려 위랑을 읍후로 임명하고 부족의 토지를 안정시켜 자기 직책을 지키도록 했다. 그 소문을 들은 주변 부족들은 대부분 항복했고 이 공로로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소기의 수령인 동봉과 그의 동생인 외거 등이 항복했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장억은 동봉을 죽이고 동봉의 아내는 모우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계략상 그녀를 사면시켰다. 외거는 서쪽 경계로 달아났다. 외거는 강인하고 용맹하였는데 많은 부족 사람들이 그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외거는 측근 두 명을 거짓으로 장억에게 항복시키고 정보를 얻으려 하였다. 장억은 이를 간파하고 그들에게 후한상을 약속하고 반대로 계획을 실행하도록 했다. 이 두 명은 함께 모의하여 외거를 죽였고 외거가 죽자 각 부족들은 모두 안정되었다. 또 사도의 우두머리 이구승은 예전에 공록을 직접 죽인 자인데 장억은 현상금을 걸어 그를 잡아들여서 그의 악행을 일일이 열거한 뒤에 죽여버렸다.

 

장억이 무너진 성곽을 보수하기 위해 성벽을 쌓았는데 이때 이민족의 남녀 모두가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후 장억은 정작,대등,비수 세 현의 서 생산되는 소금과 철, 옻을 만족들이 오랫동안 독점한 것을 알고 군의 고관에게 관리를 맡기려 하였다. 정작의 두목 낭잠은 자신들의 산업을 빼앗으려 하는 것에 화가나 있었다. 장억은 그를 잡아 때려죽여 시체를 그 마을로 보내 상을 후하게 주며 낭잠의 악행을 알렸다. 그러자 부족들은 모두 면전에서 결박하고 사과하였는데 장억은 소를 잡아 잔치를 열고 두터운 은덕과 신의를 보였다. 이로 인해 소금과 철을 얻게 되고 필요한 도구가 풍부해졌다.

 

한가군 경계에 모우이 부족의 우두머리 낭로는 고모부 동봉을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작은아버지 낭리에게 동봉의 부하들을 이끌고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장억은 일이 있기 전에 측근에게 고기와 술을 갖고 그곳으로 가 위로하게 하고 낭리는 상을 받고 아울러 그 누이를 만났으며 누이와 동생을 즐거워 수하의 부족민을 이끌고 장억을 만났다. 장억은 그들에게 상을 주고 잘 대접하여 돌려보내니 그 후로 모우이 부락은 반란이 없었다. 장억은 측근을 낭로에게 보내 재물과 비단을 주었고 다시 낭로의 고모에게 그의 뜻을 설명하게 됬다. 그러자 낭로는 곧 형제와 처자식을 데리고 모두 장억을 배알했고 장억은 그와 맹세하고 옛날 역참을 회복시켰다. 장억은 조정에 상주하여 낭로를 모우구비왕으로 임명하고 사자를 보내 낭로를 유선에게 인사시키고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그래서 유선은 장억에게 무융장군을 더하고 전처럼 군 태수를 겸하게 했다.

 

후에 비의가 대장군이 되자 장억의 이민족 정책에 대해 경계를 하였는데 장억은 비의가 항복한 장수에게 살해당할 것을 예상하였고 예상대로 비의는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수에게 죽임을 당한다.또한 오나라 태부 제갈각이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장억이 전쟁에게 질 것을 예상하였다. 역시나 예상대로 제갈각은 위나라를 공격하지만 교만함으로 인해 패배하였고 곧 처형당하면서 자신의 구족을 멸망시켰다.

 

장억이 군에 부임한지 15년이 지나 그 지역은 평화로웠는데 조정에서 그를 소환하자 만족 백성들은 그를 흠모하여 모두 이별을 슬퍼한다. 장억은 탕구장군에 임명되었고 그는 이민족 뿐 아니라 사대부들 역시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하지만 그의 일처리와 예절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54(연희 17) 강유와 함께 적도로 출병하였는데 이 곳에서 위나라 장수 서질과 싸우다가 장억은 사망하게 된다. 비록 전쟁터에서 사망하였지만 그가 죽이거나 상처를 입힌 적은 배가 넘었다. 장억이 사망하자 장남 장영을 서향후에 봉하고 작은 아들 장호웅에게 그의 작위를 잇게 했다. 월수군 백성들은 장억이 죽었다는 소식에 모두 슬퍼하였고 그를 위해 묘당을 세워 사계절과 수재와 한재가 잇을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할 때 등장한다. 관색 장익등과 함께 초전에 동도나, 아회남을 사로잡는 활약을 하기도 하지만 후에 축융부인의 출전으로 패배해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후 북벌에도 참가하고 진창에서 왕쌍과 싸우다 유성추를 맞아 부상을 입기도 하지만 종종 활약하여 승리에 공헌하기도 한다. 제갈량 사후 강유를 따라 북벌에 참가하였지만 단곡에서 등애, 진태의 함정에 빠져 포위된 강유를 구하려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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