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 중덕 程昱 仲德]
정욱(程昱)의 자는 중덕이고 동군 동아현 출신이다. 141년에 태어나 220년에 사망한다. 정욱의 본래 이름은 정입(立)이었으나 어릴적 태양을 받드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조조가 듣고 일(日) 자를 더해주었다. 정욱의 신장은 8척 3촌이고 아름다운 수염을 길렀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동아현의 승 왕도가 모반하여 황건적에게 호응하고 창고를 불태워 버렸다. 현령과 백성들은 두려워서 도망갔는데 정욱은 반란군의 목적이 약탈에 있음을 알자 성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몰래 산 위로 올라가 “도적이 몰려온다”고 알리고 다녔다. 이리하여 현령들이 성으로 돌아와 자리를 지킴으로써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초평 연간(190~193년)에 연주자사 유대가 정욱을 초빙하였으나 정욱은 응하지 않았다. 청주의 황건적이 쳐들어와 유대가 사망하자 조조는 정욱을 초빙하였다. 조조는 정욱과 대화를 해보고 그를 좋아하게 되어 수장현의 영으로 삼아 그 곳을 지키게 하였다.
조조가 서주를 정벌할 때 정욱은 순욱과 함께 견성현을 지킨다. 이때 진궁과 장막등이 배신하여 여포를 연주목으로 삼자 연주의 모든 군과 현이 호응하였다. 하지만 견성현과 범현, 동아현만이 여포를 따르지 않았다. 진궁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동아현을 취하려 하고 범억을 파견하여 범현을 취하려 한다고 하자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 하였다. 순욱은 정욱에게 “중무장한 병사들이 이 세 성에 다다르고 있는데 세 성을 굳게 지키려는 마음을 깊게 연결 시키지 못한다면 세성의 민심이 동요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정욱은 동아현으로 돌아갔다. 범현을 지나갈 때 늑윤을 만났다. 늑윤은 여포에게 모친과 형제 처자식이 붙잡혀 있어 여포에게 호응하려 하였지만 정욱이 설득하여 이를 제지한다. 이때 진궁이 파견한 범억이 범현에 들어와 있었는데 늑윤이 매복하여 범억을 찔러 죽인다. 정욱은 군중으로 돌아와 병사들을 결속시키고 성을 지켰다. 정욱은 동아현에 이르러서 동아현의 영인 조지로 하여금 성을 점거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해 굳게 지키도록 하면서 조조의 대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조조는 돌아 온 후 정욱의 손을 잡으며 “그대의 힘이 없었다면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을 것이오”라고 하며 표를 올려 정욱을 동평국의 상으로 삼고 군대를 범현에 주둔시킨다. 조조는 여포와 복양에서 싸웠는데 세력이 불리하였다. 마침 메뚜기 떼로 인하여 서로 군을 물리고 퇴각하였는데 이때 원소가 조조와 화친하려 하고 조조에게 집을 옮겨 업성에서 살게 하고자 하였다. 조조가 원소에게 자신의 가족을 인질로 손을 잡으려 했지만 정욱은 “한신과 팽월”을 예로 들어 만류시킨다.
196년 (건안 원년)에 헌제를 맞아들이는 일에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순욱과 정욱은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 때 연주가 아직 조조에게 귀속되지 않아 헌제를 허현에 도읍을 정해 머물게 하고 정욱을 상서로 삼았다. 이어 정욱은 동중랑장으로 삼고 제음태수와 도독연주사로 삼았다.
유비가 서주를 잃어버리고 조조에게 귀순하였는데 정욱은 유비를 경계하여 조조에게 죽일 것을 권한다. 하지만 조조는 응하지 않았다. 후일 조조는 원술이 원소에게 도망가려 하자 유비에게 맞아 싸우도록 하였다. 곽가와 정욱은 유비에게 싸우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결국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조조를 배신한다. 오래지 않아 정욱은 진위장군이 된다.
관도전투 때 여양에 있던 원소는 군대를 남쪽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 때 정욱이 견성에서 700명의 군사로 지키고 있었는데 조조는 2천의 군사를 더 증원시켜 주려 했다. 정욱은 “지금 원소가 우리 군이 적다는 것을 보이면 원소는 반드시 우리를 가볍게 보고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인데, 만약 군사를 증원하면 그들이 통과할 때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원래의 병사와 더불어 손해가 늘어날 수 있다”고 진언하자 조조는 정욱의 말을 따랐다. 원소는 예상대로 정욱의 군대가 적다는 말을 듣고도 공격하러 오지 않았다. 조조는 정욱의 냉정한 판단력과 담력을 크게 칭찬한다.
정욱은 산천에서 떠도는 무리를 거두어 정병 수천을 얻어 조조와 여양에서 합류한다. 정욱은 조조를 따라 원담과 원상을 토벌하였고 원담과 원상이 무너지자 정욱을 분무장군으로 삼고 안국정후로 봉하였다.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러 가자 형주자사 유표가 사망하고 아들 유종이 뒤를 이었는데 유종은 항복하고 유비는 오나라쪽으로 달아났다. 사람들은 손권이 유비를 죽일 것이라 하였으나 정욱은 손권이 유비의 힘을 빌어 조조에게 대항할 것이란 것을 예측하였고 예상대로 손권은 유비에게 군병을 제공하여 조조를 제어하려 들었다. 이 후 중원이 안정되어가자 조조는 정욱의 등을 두드리며 “연주의 패배가 있었을 때,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지경에 이를 수 있었겠소?”라고 하였다.
정욱은 연회에서 “만족할 줄 알아 욕되지 않았으니 이만 물러나기를 고합니다”라고 표를 올려 병사들을 돌려보내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칩거에 들어간다. 정욱의 성격은 강직하고 강퍅하였는데 사람들과 교류하는데 여러 번 어그러졌다. 정욱이 모반을 계획한다고 알리는 자도 있었지만 조조는 오히려 정욱에게 하사품을 내리고 더욱 더 두터이 대우했다.
위나라가 건국된 후에 정욱은 위위로 임명되었는데 중위 형정과 위엄과 의례를 다투다가 면직되었다.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 다시 위위가 되고 승진하여 안향후에 봉해졌다. 그 해 작은아들 정연과 손자 정효가 열후에 봉해지고 삼공이 되려 할 때 정욱은 사망하였다.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정욱에게 거기장군을 추증하고 시호를 숙후라 하였다. 아들 정무가 후사를 이었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산에 은거하여 있을 때 순욱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초빙되어 관직을 하게 되었고, 곽가와 유비를 죽이라고 진언하는 한편 조조에게 제위에 오르도록 권유하는 비정한 군사로 묘사된다, 또한 하비에서는 유비의 처를 인질로 잡고 관우를 항복시키게 하는 한편 원소와의 창정전투에서 십면매복지계로 원소군을 격파하는등의 모습이 나온다.
후에 유비가 유표를 의지할 때 조인이 패배하자 유비의 참모 단복의 정체가 서서임을 파악하고 서서의 모친을 속여 거짓 편지를 써 서서를 불러들인다. 적벽전투에서는 화공을 조심할 것을 진언하고, 황개의 투항이 거짓임을 간파하기도 하였지만 대패하여 도주하였는데 이 때 관우에게 차단당하자 조조에게 관우의 의리 있는 성격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하라고 진언하여 무사히 빠져나가는 장면도 나온다. 그 후 손권과 유비를 이간질 시켜 주유를 남군태수, 정보를 강하태수로 임명하여 유비와 손권을 싸우게 만들었으며 조조가 유수구에서 손권과 대치하는데 공격에 지쳐 퇴각을 진언하기도 하지만 이후의 모습을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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