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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75. 우금 문칙

[우금 문칙 于禁 文則]

 

우금의 자는 문칙이며 태산군 거평현 출신이다. 생년 미상이나 221년에 사망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포신을 섬긴다. 후에 연주에 황건적이 침입했을 때 포신이 전투에서 전사하자 우금은 동료들을 이끌고 조조를 만나 도백이 되어 장군 왕랑에게 소속되었다. 왕랑이 조조에게 우금이 대장군을 맡을 능력이 된다고 높이 평가하자 조조는 우금을 군사마로 임명하고 서주로 가서 광위를 공격하게 한다. 우금이 광위를 함락시키자 함진도위로 임명된다.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조를 따라 여포와 싸웠으며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조조를 따라 황건적 유벽과 황소를 토벌하러 갔는데 황소가 조조의 진영을 야습하자 우금은 부하들을 이끌고 황소를 죽이니 그의 부하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 공으로 평로교위로 임명되며 진국을 침공한 원술의 장수 교유를 포함한 4명의 장수를 죽이기도 한다.

 

조조를 따라 완성에서 장수를 정벌하러 갔을 때 장수가 항복을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가 패하여 퇴각하자 우금도 홀로 부하들을 이끌고 적의 추격을 따돌리고 조조와 합류한다. 퇴각 중 하후돈의 청주병이 약탈을 일삼는다는 보고를 들은 우금은 청주병들을 토벌하고 그들을 죽인다. 청주병들이 조조에게 달려가 우금의 죄상을 고했는데 우금은 적의 추격을 대비할 진지를 구축하고 조조를 알현한다. 조조는 우금을 벌하기는커녕 혼란상황에서도 부대를 잘 수습하고 앞뒤 전공을 따져 익수정후에 봉한다.

 

조조가 장수를 다시 공격할 때 전투에 참여하고, 하비에서 여포를 죽이고, 사환,조인과 함께 사견에서 혜고와 전투를 벌여 혜고를 죽인다. 조조와 원소와의 싸움이 멀지 않았을 때 우금은 선봉을 자처하고 연진에서 주둔하여 원소와 대치한다. 서주에서 유비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유비를 정벌하러 갔는데 원소가 우금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우금은 조조의 명을 받고 원소와의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에 참여하고 비장군이 되었다가 관도에서 원소가 격파된 후 편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기주가 평정되었을 때 친구 창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금은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창희는 우금에게 항복하였지만 조조에게 알리기도 전에 우금은 창희를 죽였다. 이 공으로 호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 후에 장패와 함께 매성을 공격하였고 장료와 장합등이 진란을 토벌한다. 매성의 부하들은 항복한 후 다시 진란에게 도망쳤는데 진란과 다시 대치하던 장료는 군량이 부족하였다. 우금은 장료에게 군량을 대주어 진란과 매성을 죽였다.

 

우금은 조조가 전투에 나갈 때 마다 항상 선봉에 섰으며 퇴각할 때에는 항상 후방을 지켰다. 우금은 군사들을 엄히 다스리는 대신 전리품을 자신이 소유하기보다 부하들에게 베풀어 항상 많은 상을 받았다. 하지만 법률로써 엄격하고 냉철하게 부하들을 다스리니 부하들의 환심을 얻지는 못하였다.

 

조조는 항상 주령을 싫어하여 그의 군대를 빼앗으려 하였는데 우금에게 교지를 갖고 가게 했다. 우금은 직접 주령의 군영에서 그의 군대를 빼앗으려 하니 주령과 그의 부하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령을 우금의 밑에 편입시키고 지휘관으로 임명하니 모두가 복종하였다. 우금을 좌장군으로 임명하였다.

 

219 (건안 24) 조인이 관우에게 번성에서 포위당하자 조조는 우금에게 조인을 돕도록 하였다. 당시 가을에 비가 많이 내려 한수가 범람하는 바람에 우금의 군대는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의 군대가 혼란에 빠지자 관우는 공격을 하니 우금은 결국 사로잡히고 관우에게 항복한다. 방덕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는데 관우에게 살해당했다.

 

형주를 기습한 손권에 의해 관우는 죽게 되었는데 이때 우금은 오나라로 옮겨지게 된다. 조비가 즉위한 후 손권이 신하의 예를 취하면서 우금을 위나라로 돌려보낸다. 조비가 우금을 불러 만났는데 우금은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용모가 초췌했으며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조비는 위로하고 우금을 안원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면서 조비는 조조의 능에 참배할 것을 명하였는데 조비가 미리 사람들에게 조조의 능에 우금이 항복할 때 상황을 그리도록 했는데 그 것을 본 우금은 수치를 느낀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한다. 우금의 시호를 여후라 하였고 아들 우규가 작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