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군 장문 陳羣 長文]
진군의 자는 장문이며 영천군 허창현 출신이다. 생년은 미상이나 235년에 사망한다. 조부 진식, 부친 진기, 숙부 진심과 함께 모두 이름이 높았다. 진군은 어릴 적부터 재능이 있어 아버지 진기는 집안 어른들에게 우리 가문을 일으킬 사람이라 하였고 노나라의 공융조차도 인정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유비가 예주자사가 되자 진군을 별가로 임명하고 그를 섬기게 된다. 서주에서 도겸이 사망하고 유비를 후임으로 삼으려 하자 진군은 “원술과 여포가 있어 위험하다”고 충고한다. 유비는 진군의 충고를 듣지 않고 서주로 갔다 원술과 충돌하였고 여포가 하비를 습격하여 빼앗으니 유비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후회하였다.
진군은 난을 피해 아버지를 따라 서주로 갔고 여포가 패배하자 조조는 진군을 서조연속으로 삼았다. 어떤 사람이 악안 사람 왕모와 하비 사람 주규를 천거하였는데 조조는 그들을 부르려 하였다. 하지만 진군은 그들이 도덕을 일그러뜨리는 인물이라 하였지만 조조는 듣지 않았다가 후에 왕모와 주규는 모두 악한 일을 하여 모두 처형되었으며 조조는 진군에게 사과를 하였다.
후에 진군은 광릉의 진교와 단양의 대건을 천거하였는데 조조는 그들을 모두 임용하였다. 대건은 오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막다가 난리 속에서 사망하였고 진교는 명신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진군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생각했다. 진군은 소찬,장평의 영을 역임하다 부친 진기가 사망하자 관직에 떠났다가 후에 사도연으로 임명된다. 이어 치서시어사가 되었으며 참승상군사로 전임되었다가 어사중승으로 승진한다.
진군이 어사중승으로 있을 때 조조가 코 베기, 다리 자르기등의 육형 제도를 부활시키려 하자 진군은 반대하였고 결국엔 중지 된다. 이 후 진군은 시중이 되었고 승상의 동서조연을 통솔했다. 조비가 태자가 되었을 때 진군을 존경하며 예로써 대하였다.
조비가 왕위에 오른 후 진군은 창무정후로 봉해지고 상서로 임명되었는데 진군은 구품관인법을 건의하여 제정한다. 조비가 사망할 때 사마의,조진,조휴와 함께 조예의 보좌를 부탁한다. 조진이 표를 올려 촉을 정벌해야 한다고 몇 차례 주장하였는데 진군은 군량미 보급에 어려움이 있다고 반대하였고 결국 며칠 동안 장마비가 내려 조진을 돌아오게 하였다.
조예가 궁궐을 짓기 시작하자 백성들이 동원되는 바람에 농사 지을 시기를 놓쳤다. 이에 진군은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을 고단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여 조예는 노역을 줄였다. 235년에 진군이 사망하자 시호를 정후라 하였고 아들 진태가 작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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