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 중영 董卓 仲穎]
동탁의 자는 중영이며 농서군 임조현 출신이다. 생년은 미상이지만 192년에 사망한다. 동탁은 젊은 시절 협기를 숭상하여 일찍이 강족이 사는 곳까지 떠돌아다니며 그 우두머리들과 사귀었다. 그 후 향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밭갈이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푼다. 이에 감동한 강족 우두머리들은 동탁에게 1000여 마리의 가축을 주었다.
한나라 환제 말년에 육군 가운데 훌륭한 집안의 아들을 선발할 때 우림장으로 뽑히고, 167년 흉노중랑장 장환 밑에서 사마로 종군하여 한양에게 강족을 쳐부순 공으로 낭중이 되었고 비단 9000필을 받았다. 하사 받은 비단은 모두 부하에게 나눠 주어 동탁이 보스 기질과 인심 장악술에도 뛰어 났던 것으로 보인다.
광무령, 촉군북부도위,서역무기도위로 옮기다가 면직되었다. 다시 조정에 부름을 받고 병주자사 하동태수로 임명되고 중랑장으로 옮겨 184년 황건적의 난 때 황건적을 토벌한다, 동탁의 군대가 패배 하였기 때문에 그 죄로 파직 당하였다.
184년 (광화 7년)에 양주에서 서량의 강족이 반란을 일으켜 호족인 북궁백옥과 이문후,송양,송건,왕국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금성군을 쉽게 함락시키기 위해 변장과 한수를 끌어들여 겁박하여 거병해서 난을 일으켰다. 이 때 동탁은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되어 서쪽으로가 한수를 막았다.
망원협 북쪽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강족,호족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식량이 다 떨어졌다. 동탁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 처럼 꾸며 돌아가는 길에 나루터에 둑을 쌓고 수십리의 물결을 가득 가두었다. 그러고는 둑 아래로 병사들을 몰래 지나가도록 하여 둑을 무너 뜨리고, 강족은 소식을 듣고 추격 하였지만 강이 깊어 건너오지 못했다. 진압군이 패하고 동탁의 군대만 전력을 보전한 채 돌아오자 동탁은 전장군으로 임명되고, 합향후로 봉해지며, 병주목으로 승진했다.
186년 겨울 한수에 세력이 커지자 경비의 부장이었던 마등은 한수에게 가담하여 적도 사람 왕국을 주군으로 추대하였다. 188년 11월 한수와 마등이 주군으로 추대한 왕국이 진창을 포위하자 조정에서는 황보숭과 동탁에게 4만의 군사를 주어 토벌하게 한다. 황보숭과 동탁의 지위는 같았으나 주장으로는 황보숭, 부장으로는 동탁이 되자 동탁은 이를 엄청난 치욕으로 생각했다.
동탁이 진창으로 바로 가야 한다 했지만, 황보숭은 진창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며 반군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189년에 왕국이 스스로 진창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자 황보숭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였다. 동탁이 이번에는 궁지에 몰린 적을 치는 것이 위험하다고 반대하지만 황보숭은 동탁을 후방에 남겨둔 채 추격하여 반군을 소탕한다. 황보숭과 동탁의 의견이 자주 부딪혀 둘의 사이가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동탁은 이 일로 몹시 부끄럽고 한스러워 황보숭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중앙에서는 동탁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조정으로 소환하여 소부로 삼고 군대를 삼고 좌장군 황보숭에게 동탁의 군대를 맡기려 하였지만 동탁은 계속 해서 칙명을 거부한다.
영제가 붕어하고 소제가 즉위한 후, 원소가 환관들을 주살할 계획하여 하진에게 제안한다. 하지만 하태후는 동의하지 않았고, 하진은 전국의 제후를 소집하는데 동탁도 불려 낙양으로 오게 하였다. 하지만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패배하였고, 중상시 단규 등이 황제를 위협하여 소평진으로 도주했지만, 상서 노식과 하남중부연 민공이 쫓아가 죽였다. 단규를 전멸시키고 동탁은 북망산에서 황제 일행을 영접해 낙양으로 돌아온다.
이 때 동탁의 세력은 3천명 밖에 없었지만 4~5일 간격으로 밤에 네 성문에 밖으로 군병을 보내 다음날 아침 군기와 북을 가지고 입성시켜 대군처럼 보이게 한다. 이 것으로 하진의 동생이였던 거기장군 하묘가 동탁에게 귀의한다. 동탁은 또 여포를 부추겨 집금오 정원을 죽이고 그의 군대도 병합하게 된다. 그래서 수도의 군사 지휘권은 오직 동탁에게만 있었다. 동탁은 사공 유홍을 면직시키고 대신 그 자리에 오른 후 태위로 승진한다.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홍농왕으로 삼고 진류왕 유협을 황제로 삼는다. 동탁은 헌제를 옹립한 공이 있다 하여 상국이 되고 미후에 봉해지며, 자신의 어머니를 지양군에 봉한다. 동탁은 황제를 만날 때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되고, 칼을 찰 수 있었으며 신발을 신고 궁전에 오를 수 있었다. 동탁은 이미 정예 부대를 인솔하고 황실이 큰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무기고, 갑옷, 각종 기물,나라의 보옥을 차지하며 천하의 위세를 떨친다.
동탁은 포악함이 극심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중에 주민들이 춘절을 즐기는 것을 보자 거기에 있던 남자들의 목을 베고 아낙과 보물을 탈취하여 병사들의 첩으로 주고, 심지어 궁녀나 공주에게까지 폭행을 가하게 된다. 이와 같은 만행을 참을 수 없어 월기교위 오부는 동탁을 살해 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살해된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조조가 왕윤에게 칠성검을 받아 동탁을 살해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도망가는 모습도 나오기도 한다.
동탁은 상서 주밀, 성문교위 오경등을 신임하여 그들이 추천한 한복,유대,공주,장자,장막등을 임명하여 주와 군을 다스리게 하지만 이들은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동탁을 토벌하려 했다. 소식을 들은 동탁은 화가나서 주밀과 오경을 죽인다.
동탁은 각지의 제후들이 일어나자 불안해 하며 수도를 장안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동탁은 낙양궁을 불태우고 능묘를 모두 파헤쳐 진귀한 물건들을 탈취한다. 동탁은 장안에 도착하여 태사가 되어 상보라고 불린다. 또한 자신의 동생 동민을 좌장군의 호후로 봉하고 형의 동생 동황은 시중과 중군교위가 되어 군대를 통솔하는 한편, 동씨 종족 안팎의 사람들을 모두 조정 관리로 만들었다.
동탁은 미오를 세웠는데 높이를 장안 성벽처럼 하고 30년간 먹을 양식을 비축한다. 동탁은 일이 성공하면 천하를 지배하고 실패하면 이곳을 지키며 일생을 마치겠다고 한다고 했다. 한번은 동탁이 미오로 나가자 공경 이하의 관리들이 횡문 밖에서 송별연을 열었다. 동탁은 먼저 장막을 설치하고 술을 마시다가 북지군의 항복한 반란군 수백명을 좌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들의 혀를 자르고 손과 발을 절단하고 눈을 뽑아 큰 가마솥에 삶았다. 또 죽지 않은 자는 땅에 엎드린 채로 술잔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하니 모인 사람들은 벌벌 떨며 그릇과 젓가락을 떨어뜨리는데도 동탁은 태연하게 계속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동탁은 평소 장온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동탁은 내심 그를 증오했다. 동탁은 그에게 원술과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매질하여 죽였다. 동탁의 법령은 가혹했고, 좋고 싫음에 따라 형벌을 어지럽게 했으며, 이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자만 1천명이 넘었다 한다.
동탁은 구리로 만든 사람 형상, 종거를 전부 부수고, 오수전을 녹여 소전으로 화폐 개혁을 실시했으나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올라 곡식 한 섬이 수십만전에 이르는 현상에 이르렀다. 이후 동전 화폐는 유통되지 않았다.
사도 왕윤은 상서복야 사손서와 동탁의 대장 여포와 함께 동탁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고, 그때 헌제의 병세가 막 호전되어 미양전으로 신하들을 모이게 했다. 여포는 같은군 출신인 기도위 이숙에게 친위병 10명을 인솔하여 위사의 의복을 입고 변장하고 궁전 옆문을 지키게 하였다.
여포는 조서를 품고 동탁이 도착하자 이숙등이 칼을 동탁을 향해 겨누었다. 당황한 동탁이 여포를 찾았지만 여포는 동탁을 죽이라는 조서를 들고 동탁을 살해하고 삼족을 멸한다. 동탁의 목은 효시되고 시체는 거리에 내버려 졌으며, 미오성은 황보숭이 점령하였는데 동탁은 금 2~3만근에 은 8~9만근, 비단과 구슬등의 온갖 보물을 산처럼 쌓아 놓았다고 한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왕윤이 초선을 이용하여 연환지계로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이간시켜 동탁을 살해하는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역사 > 삼국지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지 인물 21. 여백사 (0) | 2016.01.05 |
---|---|
삼국지 인물 20. 왕윤 자사 (0) | 2016.01.05 |
삼국지 인물 18. 하진 수고 (0) | 2016.01.04 |
삼국지 인물 17. 변장 (0) | 2016.01.04 |
삼국지 인물 16. 한수 문약 (0) | 2016.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