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지 자화 司馬芝 子華]
사마지의 자는 자화이며 하내군 온현 출신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사마의의 사촌형으로 젊어서 서생이 되었고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갔는데 노양산에서 도적을 만났다. 함께 가던 사람들은 모두 노약자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사마지만은 혼자 앉아서 노모를 지켰다. 도적이 와서 사마지에게 칼을 들이대자 사마지는 고개를 숙이며 “제 어머니는 늙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오직 당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도적은 “이 사람은 효자다. 이자를 죽이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하며 사마지를 놓아주었으며 작은 수레에 어머니를 태우고 갔다.
형주에서 10년간 밭을 갈며 지조를 지키며 살다가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자 사마지를 초빙하여 제남군 관현의 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천하가 막 세워질 때여서 법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는데 군의 주부 유절은 그 지역의 오랜 사람으로 사람됨이 호방하고 협기가 있어 빈객이 1000여 명이 되었다. 군 밖으로는 도적이 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관리의 통치를 어지럽혔는데 오래지 않아 사마지는 유절의 빈객 왕동 등을 병사로 징병하려 하였다.
현의 관리 연사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요역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도착했을 때 숨긴다면 반드시 부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마지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유절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을 징병할 것을 요구하니 유절은 왕동 등을 숨겼다. 독우는 병사 조달이 부족한 현의 관리들을 추궁하였는데 연사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왕동 등을 대신해 가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사마지는 곧 문서를 써서 빠른 말로 제남에 보내 유절의 죄상을 진술하였다. 제남 태수 학광은 평소 사마지를 존경하고 신임하였기 때문에 즉시 유절에게 왕동을 보내도록 하였다. 그래서 청주 사람들은 “군의 주부를 병사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사마지는 광평현의 영으로 승진하였다. 이번엔 정로장군 유훈이 신분이 높고 은총을 받으며 교만하고 호사스럽게 행동하였다. 유훈은 사마지와 같은 군 출신 장수였는데 그의 빈객과 자제들이 여러 번 법을 어겼다. 유훈은 사마지에게 성씨와 이름을 쓰지 않고 편지를 보내 여러 차례 부탁하였는데 사마지는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고 모두 법대로 처리하였다. 후에 유훈은 불법 행위를 하여 처형당하였고 관련 있는 자들은 모두 처벌 받았지만 사마지만은 칭찬을 받았다.
사마지는 대리정으로 옮겼는데 관부의 베와 비단을 훔쳐 변소에 갖다 놓는 자가 있었다. 관리들은 여공을 의심하여 붙잡아서 옥에 가두었는데 사마지는 죄인에게 과실을 줄 때 가혹하게 형벌하지 말고 장물을 획득한 후에 심문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조조는 그의 건의에 따라 처리하였다. 이후 감릉, 패, 양평의 태수를 역임하고 재임하는 곳 마다 공을 세웠다.
황초 연간에 중앙으로 들어가 하남윤으로 임명되고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우며 사사로운 청탁을 받지 않았다. 내관이 사마지에게 청탁을 하려 하였지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사마지의 아내의 백부인 동소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동소 또한 사마지를 두려워했으므로 그를 위해 알리지 않았다. 사마지는 직접 교령을 만들어 아랫사람들에게 주었고 사마지 휘하 관리들 중에 스스로 힘을 기울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조예가 즉위한 후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오래지 않아 특진 조홍의 유모 당과 임분공주의 시녀가 함께 무간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옥에 갇혔다. 변 태후는 환관 황문을 사마지의 관소로 보내 뜻을 전하였지만 그는 보고하지 않은채 불시에 낙양의 옥리에게 칙명을 내려 심문하도록 하고 상소를 올렸다.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사람은 모두 먼저 상주해 사형 집행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전 칙령에는 사악한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금지해 풍속을 바르게 했습니다. 지금 당 등이 범한 것은 음란한 죄행으로서 사어(辭語)가 비로소 정해졌는데, 황문 오달이 신을 찾아와 태황태후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신은 감히 이 명령을 받지 못하고, 명령 주에 범인을 돕거나 보호하라는 내용이 있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성상께서 빨리 알도록 했다면 부득이 범인을 불쌍히 여겨 그녀들을 보호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 원인이지만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때문에 통상적인 규정을 무시하고 즉시 낙양현에 칙령을 내려 심리를 하도록 했습니다. 신이 독단적으로 처형을 시행했으니 엎드려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조예는 답장을 하며 말하였다.
표를 살펴보니 그대의 지극한 충성심은 분명해졌소 그대가 조서를 받들려고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한 것은 옳소 이는 그대가 조서의 취지를 받든 것인데 무엇을 사죄한단 말이오? 지금 이후로 황문이 다시 그대에게 간다면 일을 신중히 하고 그를 만나지 말도록 하시오.
사마지는 그 관직에 11년 동안 있었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법 조문의 불편한 점에 대해 논하였다. 그는 공격들 사이에서도 곧은 태도로 행동하였다. 마침 여러 왕이 입조하여 수도 사람들과 교류하였는데 사마지는 역모에 연루되어 관직을 박탈당했다. 후에 대사농이 되었다. 농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관할 백성들을 상공업에 종사시켜 이익을 취하고 있었는데 사마지는 상소를 올렸고 조예는 그의 의견을 따랐다.
사마지는 매번 상관이 불러서 물어보려고 하면 사마지는 항상 먼저 연사를 만나 상관들의 의도를 판단하고 그들이 승낙하고 반대할 때의 상황을 가르쳐 주었는데 모두 사마지의 예상한 바와 같았다. 사마지는 천성이 밝고 정직하였지만 품행이 바르게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빈객과 의논할 경우 그의 생각에 수긍할 수 없으면 곧 정면에서 그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지만 물러난 후에는 비난하지 않았다. 재직 중에 사망하였는데 집안에 재산이 없었다. 위나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남윤을 지낸 사람 중에 사마지에 미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사마지가 사망한 후 사마기가 작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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