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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181. 장패 선고

[장패 선고 臧覇 宣高]

 

장패의 자는 선고이며 태산군 화현 출신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18세 때 아버지 장계가 현옥연을 역임하였는데 태수가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이려 하자 법을 근거로 내세워 듣지 않았다. 태수는 매우 화가 나서 장계를 체포하여 역소로 보내도록 하였는데 이 때 압송하는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장패는 빈객 수십 명을 인솔하여 비현 땅의 서산으로 가서 부친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압송하던 사람들도 감히 반항을 하지 못했고 장패는 아버지아 함께 동해로 망명하였다. 이 일로 그의 용감하고 웅장한 기개가 알려지게 되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장패는 도겸을 따라 그들을 공격하여 무찔러 기도위에 임명된다. 그리고 서주에서 병사를 모아 오돈, 윤례 등과 군대를 합쳤다. 장패는 개양에 주둔하였는데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 때 장패는 군사를 이끌고 여포를 도왔다. 조조가 여포를 붙잡고 처형시키자 장패는 몸을 숨겼다. 조조는 사람을 모아 장패를 찾게 하여 찾았는데 조조는 장패를 보고 매우 좋아하였다. 그리고 장패로 하여금 오돈, 윤례, 손관, 손강 등을 불러오게 하여 모두를 만났다.

 

조조는 장패를 낭야의 상으로, 오돈을 이성 태수로, 윤례를 동완 태수로, 손관을 북해 태수로, 손강을 성양 태수로 임명하고 청주와 서주 두 주를 분할하여 장패에게 관리하도록 하였다. 조조가 연주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서흡, 모휘를 장군으로 삼았는데 연주에 난리가 일어나자 서흡과 모휘는 조조를 배신하였다. 후에 연주가 평정되자 서흡과 모휘는 장패에게 도망가 투항했다. 조조는 유비에게 말해 두 사람의 머리를 보내라고 전하게 하였는데 장패는 나 장패가 스스로 설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 공의 은혜를 받아 명령을 거스를 순 없소 그러나 대업을 성취하려는 군주는 대의와 부합되는 언사로 말해야 할 것이오 원컨대 장군께서 나를 대신하여 말을 잘 전해주시오라 하였다. 유비는 장패의 말을 조조에게 전하였는데 조조는 탄식하며 장패에게 이것은 옜 사람이 행하던 일인데 그대가 실행하다니 이는 나 또한 원하는 바요라고 말하고 서흡과 모휘를 태수로 임명하였다.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장패는 자주 정예 병사를 이끌고 청주를 침입하였기 때문에 조조는 원소와의 싸움에 전념하고 동쪽일을 신경쓰지 않았다. 조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죽이자 장패 등은 축하하러 모였다. 장패는 이 기회에 업성에 자기와 여러 장수들의 가족을 업성으로 옮겨 가기를 청하였는데 조조는 허락하였다.

 

청주에 소란이 일어나자 장패 등은 포악한 적을 정벌하여 청주 일대를 평정했는데 그 공로가 매우 컸기 때문에 참전한 장수들을 모두 열후에 봉하였다. 장패는 도정후에 임명되고 위로장군의 관직이 더해졌다. 우금과 더불어 창희를 토벌하고 하후연과 함께 황건적 잔당 서화등을 토벌하여 서주자사로 승진하였다. 패국의 무주는 하비현의 영으로 임명되었는데 장패는 무주를 매우 존경하여 직접 하비현의 관사로 가서 그를 만났다. 무주에게 배속된 종사가 경박하고 법을 어기자 그의 죄상을 파악한 후 체포하여 심판했으므로 장패는 더욱 존경을 받게 되었다.

 

조조를 따라 손권을 토벌할 때 선봉에 섰으며 다시 소호로 진입하여 거소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장료가 진란을 토벌할 때 장패는 따로 파견되어 환현까지 가서 오나라 장수 한당을 토벌하였고 손권으로 하여금 진란을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당이 군사를 보내 장패를 맞아 싸우게 하자 장패는 봉용에서 싸웠다. 한당은 또 병사를 보내 협석에서 장패와 싸웠지만 장패는 그들을 무찌르고 서구로 돌아와 주둔했다. 손권은 수만의 군사를 파견하여 서구로 보내 진란을 구하게 하였는데 장패의 군대가 서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했다. 장패는 밤에 그들을 추격하여 날이 밝을 때까지 100여 리쯤 와서 적을 앞뒤로 공격했다. 적은 사태가 급박해지자 배를 타지도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황급히 물속에 뛰어들었다. 때문에 손권은 진란을 구하지 못하였고 장료는 진란을 무찌를 수 있었다.

 

장패는 조조를 따라 유수구에서 손권을 토벌할 때 장료와 선봉에 섰는데 도중에 장마를 만났다. 대군이 먼저 도착했는데 수위가 높아지고 적군의 배가 점점 가까워지자 모두 불안해 하였다. 장료가 돌아가려하자 장패는 조공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조는 다음날 철수하라고 명령하였고 장료는 진영에 도착한 후 상황을 조조에게 보고하였는데 조조는 장패를 칭찬하여 양위장군으로 임명하고 가절을 주었다. 후에 손권이 투항을 하자 조조는 병사를 철수시키고 장패와 하후돈을 거소에 주둔시켰다.

 

조비가 왕위에 오르고 진동장군으로 승진했고 모안향후로 작위가 높아졌으며 청주 군사를 지휘 했다.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후 개양후에 봉해지고 다시 양성후에 봉해졌다. 조휴와 함께 오나라를 토벌하고 동포에서 여범을 격파했다. 전투 후 조정으로 불려가 집금오가 되었고 특진 자리에 올랐다. 조비는 매번 군사에 관한 일은 장패를 찾아가 물었다. 조예가 즉위한 후 식읍이 500호로 늘어 이전 것과 합쳐 2500호가 되었다. 장패가 세상을 떠난 후 시호를 위후라 하였고 아들 장애가 작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