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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180. 종요 원상

[종요 원상 鍾繇 元常]

 

 

종요의 자는 원상이고 영천군 장사현 출신이다. 151년에 태어나 230년에 사망한다. 일찍이 재당숙 종유와 함께 낙양에 갔다가 길에서 관상을 보는 사람을 만났는데 관상을 보는 이가 말하였다. “이 아이는 귀인의 상을 갖고 있지만 물에서 재앙을 당할 것이니 힘을 기울여 보살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10리도 못 가서 다리를 건너다 말이 놀라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났다. 종유는 관상 보는 사람의 말이 적중했다고 생각하고 종요를 더욱 귀하게 여겨 물품과 비용을 제공해주며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종요는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과 양릉현의 영으로 임명되었다가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또 삼부에 초빙되어 정위정, 황문시랑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헌제가 장안에 있을 때 이각과 곽사가 장안성을 함락시키자 관동과의 소통이 단절되었다. 연주목 조조는 사신을 파견하여 헌제에게 글을 올려 사명을 다하려 하였지만 이각과 곽사가 사신을 억류하며 어떻게 거절할지를 고민하였다. 종요는 조조만이 황실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그의 충성심을 거스르려 해서는 장래의 희망에 부합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각과 곽사는 그의 말을 듣고 조조의 사신을 후하게 보답하였다.

 

조조는 이미 종요에 대한 칭찬을 순욱을 통해 들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종요에 대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후에 이각이 헌제를 핍박하자 상서랑 한빈과 함께 책략을 세워 헌제를 장안으로 빠져나가게 한다. 종요는 어사중승으로 임명되고 시중, 상서복야로 승진하였으며 이전 공로를 더하여 동무정후로 봉하였다. 당시 마등과 한수가 강력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로 싸웠는데 조조가 마침 산동에 있었으므로 관중을 걱정하였다. 이에 종요를 시중의 신분으로 사예교위를 겸하도록 한다음 지절을 주어 관중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도록 하고 자유롭게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종요는 장안에 도착하여 마등과 한수에게 화복을 설명하니 그들은 각자 조정에 아들을 보내 모시도록 하였다. 그 후 평양에서 흉노의 선우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종요가 군사들을 이끌고 포위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때 원상이 임명한 하동 태수 곽원이 하동으로 오니 적의 군세가 매우 강하였다. 장수들은 하동을 버리고 떠나려 하였지만 종요는 그들을 설득하였고 장기를 마등에게 파견하여 설득한 후 곽원을 공격하게 하였다. 곽원이 분수를 건너는 도중 마초가 공격하여 곽원을 죽이고 선우를 항복시켰다.

 

이후 하동에서 위고가 난을 일으켜 장성, 장염, 고간 등이 호응하였는데 종요는 그들을 격파하였다. 수도가 낙양에서 장안으로 바뀐 후 낙양의 백성이 매우 줄어있자 종요는 관중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망명한 자들과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보충하니 몇 년 만에 낙양의 백성 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는 조조가 관중을 정벌할 때 군사력의 원천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조는 상주하여 종요를 전군사로 임명하였다.

 

위나라가 건국되자 대리가 되었으며 상국으로 승진하였다. 조비가 동궁에 있을 때 종요에게 오숙부를 주었다. 몇 년이 지나 서조연 위풍이 모반을 도모한 일에 연루되어 파직한다는 책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조비가 즉위한 후 다시 대리가 되었다. 조비가 황제가 되자 정위가 되었으며 승진하여 숭고향후에 봉해졌다. 또 태위로 승진하고 전임되어 평양향후에 봉해진다. 당시 사도 화흠과 사공 왕랑도 종요와 더불어 선대 이래의 명신이었는데 조비는 조회를 끝마친 후에 이들을 이을 만한 인물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

 

조예가 즉위한 후 승진하여 정릉후에 봉해졌고 태부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종요는 무릎에 병이 있어서 절하고 몸을 일으키기가 불편하였는데 화흠 역시 나이가 많아 병을 앓았다. 이들 두사람은 조회를 할 때 모두 수레에 타고 참가하도록 하였으며 근위병들이 들어서 자리에 앉혔다. 이후에는 삼공에게 병이 있으면 이 사례가 선례가 되었다. 23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조예는 상복을 입고 조문하였다. 시호를 성후라 하였으며 아들 종육이 작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