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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246. 왕찬 중선

[왕찬 중선 王粲 仲宣]

 

 

왕찬의 자는 중선이고 산양군 고평현 출신이다. 증조부 왕공과 조부 왕창은 모두 한나라 때 삼공을 지내셨고 부친 왕겸은 대장군 하진의 장사였다. 하진은 왕겸이 삼공의 후예였으므로 인천 관계를 맺으려고 자신의 두 딸을 보여 선택하도록 했지만 왕겸은 승낙하지 않았다.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고 장안으로 천도할 때 왕찬도 장안으로 이주하였는데 좌중랑장 채옹은 그를 보고 매우 기이해 하였다. 왕찬이 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듣고 채옹은 신발을 거꾸로 신고 그를 영접하였다. 왕찬이 들어오자 빈객들은 그가 나이가 어리고 용모도 왜소하였으므로 매우 놀랐는데 채옹은 이 사람은 왕공의 손자로서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으며 나는 그만 못하오 우리 집에 있는 서적과 문학 작품을 모두 그에게 주어야 하오라고 하였다.

왕찬은 17세에 사도에 초빙되었고 조서를 받아 황문시랑으로 임명되었지만 당시 장안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의탁하였다. 유표는 왕찬의 용모가 추하고 신체가 허약하고 경박하다 하여 중용하지 않았다. 후에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려 할 때 마침 유표가 사망하였는데 아들 유종이 후계자를 이었다. 왕찬은 유종에게 조조에게 귀의할 것을 권했고 항복하였다. 조조는 왕찬을 초빙하여 승상연으로 삼았으며 관내후 작위를 하사했다. 후에 왕찬은 군모좨주로 승진했으며 위나라가 건립되고 나서는 시중에 임명되었다.

왕찬은 박학다식하여 묻는 것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당시 예의 제도가 폐지되거나 느슨하게 되었는데 제도를 일으키고 만드는 것은 왕찬이 항상 주제하였다. 왕찬은 기억력과 암기력도 뛰어났고 계산도 뛰어나서 산법을 만들어 대략 그 이치를 다하였다. 글을 잘 지어서 붓을 들면 문장이 되었고 고쳐서 바로 잡을 것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아무리 미리 구상을 하고 반복하여 생각해도 그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저작으로는 시, , , 60편이 있다.

216 (건안 21) 조조를 따라 오나라를 정벌하고 217년에 길에서 병사하였는데 당시 41세였다. 왕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위풍의 반역에 연루되어 처형되어 후사가 끊겼다. 왕찬은 건안 시대에 일곱 문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건안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