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부 의산 楊阜 義山]
양부의 자는 의산이며 천수군 기현 출신이다. 생몰년도는 미상이다. 주의 종사 신분으로 주목 위단의 사자가 되어 허창으로 가서 안정 장사 벼슬을 받았다. 양부가 돌아오자 관서의 이름있는 장수들은 원소와 조조 가운데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인지를 물었다. 양부는 “원소는 관대하지만 과단성이 없고 책략을 좋아하지만 결단을 내리는 법이 없습니다. 과단성이 없으면 위신이 없게 되고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후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조는 웅대한 재능과 원대한 지략을 갖고 있고 판단하고 결심할 때는 주저하지 않으며 법령에는 일관성이 있고 병사들은 정예이며 뛰어난 인재를 파격적으로 사용하고 임용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역량을 전부 발휘합니다. 조공은 반드시 큰일을 이룰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양부는 장사 직책은 원하는게 아니었으므로 관직을 떠났다 양주자사 위단은 그를 초빙하여 태복으로 삼았고 위단의 아들 위강이 위단을 대신하여 양주자사가 되자 양부를 초빙하여 별가로 삼았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승상부에 초빙되었지만 주에 표를 올려 참군사로 남도록 했다. 마초는 위남 싸움에서 패배하여 융족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조조는 안정까지 추격하여 갔지만 소백이 하간에서 모반하는 바람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양부는 조조에게 마초를 제거해야 후환이 없다고 하였다. 조조도 옳다고 생각하였지만 빠른 시간에 군대를 물리느라 주도면밀 하지 못했다.
결국 마초는 융족들을 통솔하여 농상의 군현을 공격하였고 농상의 군현들은 모두 마초를 따랐지만 기성만은 주와 군의 관리들이 굳게 지켰다. 마초는 농우의 병사들을 모두 합쳐 차지 한데다가 한중의 장로는 대장 양앙을 보내주어 기성을 포위하였다. 양부는 나라의 사대부와 종족의 자제 중 전쟁에 참가한 1000여 명을 인솔하고 종제 양악에게 성벽 위에 초승달 모양의 진영을 만들도록 하고 마초와 전투를 벌였다. 8개월간 성을 지켰지만 구원병은 오지 않았고 별가 염온을 파견하여 물을 따라 몰래 나와 구원을 요청했지만 마초에게 살해당했다. 그 결과 자사와 태수들 중 항복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양부는 성을 굳게 지킬 것을 호소하였다.
결국 자사와 태수들은 성문을 열어 마초를 맞이하였고 기성에서 양악을 구금하고 양앙을 시켜 자사와 태수를 죽이도록 했다. 양부는 속으로 마초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적당한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오래지 않아 양부는 아내를 잃어 장례를 핑계로 휴가를 청했다. 양부의 이종사촌 형 강서가 역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강서의 어머니와 함께 만날 때 이전에 기성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해 하였다.
강서의 어머니는 매우 감동했고 강서에게 양부의 계책을 따를 것을 명하였다. 계책이 확정되자 밖에 나가 있는 고향 사람 강은, 조앙, 윤봉, 요경, 공신 등과 무도 사람 이준, 왕령과 모의를 하고 마초를 토벌하기로 약속했다. 종제 양모를 기성으로 보내 양악에게 말하게 하였다. 아울러 안정의 양관 남안의 조구, 방공등과 손을 잡았다.
212년 (건안 17년) 9월 서약을 명확히 하고 강서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마초는 양부와 강서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출전했다. 조구와 양관 등은 양악을 풀어 주고 기성의 문을 닫고 마초의 처자를 살해하였다. 마초는 역성을 습격하여 강서의 어머니를 붙잡았는데 강서의 어머니는 오히려 마초에게 욕을 퍼부었다. 마초는 노하여 강서의 어머니를 죽이고 양부는 마초와의 전투에서 다섯 군데나 찔렸으며 종족 중 일곱 형제가 전사하였다. 마초는 남쪽으로 달아나 장로에게 투항하였다. 농우가 평정되자 조조는 마초를 토벌한 공신 11명을 제후에 봉했고 양부에게는 관내후 작위를 주었지만 양부는 사양하였다.
조조가 한중을 정벌하고 양부를 익주 자사로 삼았다. 돌아온 후에 금성 태수 벼슬을 주었지만 임지로 떠나지 않았으므로 무도 태수로 전임시켰다. 무도군은 촉한과 인접해 있었는데 양부는 공수(전한시대 발해태수)의 옛 일을 따라서 안정시킬 것을 청했다. 마침 유비가 장비와 마초 등을 파견하여 저 길로부터 나와 하변을 취하자 저, 뇌정 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 모반하여 유비에게 호응하였다. 조조가 조홍을 보내 마초 등을 막게 하니 마초는 물러갔다. 조홍은 주연을 준비하여 빈객들을 대대적으로 모이게 하고 가희들에게 얇은 비단 옷을 입히고 큰 북을 발로 밟아 두드리게 하였는데 양부는 가희들의 복장을 보고 조홍을 거세게 질책하였는데 조홍은 가희들의 악무를 중지시키고 양부에게 돌아와 앉도록 청하여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유비가 한중을 취하고 하변에 이르자 조조는 무도군이 내지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곳의 백성들을 옮기려 하였는데 관리와 백성들이 토지에 집착할까 매우 걱정하였다. 양부는 평소 위엄과 신뢰가 탁월했으므로 앞뒤로 백성들과 저족 사람들을 옮겨 그들로 하여금 경조, 부풍, 천소, 경내에 살도록 하였는데 총 1만여 호나 되었다. 관청을 소괴리로 옮기자 백성들은 아이를 업고 그를 따랐다. 양부는 정치를 하면서 큰 기틀만 잡았지만 아랫사람들은 그를 속이는 일은 차마 하지 못했다.
조비는 시중 유엽에게 양부가 어떤 사람인지 묻기도 하였는데 유엽은 양부가 제왕을 보좌하는 삼공의 절의를 갖고 있다고 칭찬하였다. 조비가 양부를 조정에 부르려 하였지만 그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양부는 군에서 10여 년 동안 있다가 중앙으로 초빙되어 성문교위 벼슬을 받았다. 조예가 예법에 맞지 않는 옷을 입자 그런 옷을 못 입게 하였다. 장작대부로 벼슬을 옮겼을 때 조예가 궁전을 짓기 시작하고 미녀를 징발하여 후궁을 가득 메우고 여러 차례 사냥을 나갔는데 가을에 자연 채해를 맞이하면서 상소해 이런 것들을 문제로 여기고 개선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황실 친척들의 대우에 대해서도 말했다.
당시 옹구왕 조식은 마음속에 원망을 품고 있었으며 자신도 번국의 왕으로 지극히 친했으나 법률이나 금령이 엄격하고 세밀했다. 때문에 양부가 또 구족의 의리에 대해 진술하자 조예는 조서를 내려 후에 양부는 승진하여 소부에 임명되었다. 조진이 촉을 공격할 때 큰 비로 낙수, 한수, 하수가 넘치자 표를 올려 그를 돌아오도록 주장하여 군대를 돌아오게 하였다. 235년에 조예가 또 허창에 새로 궁을 짓고 낙양궁을 증축하는 등 백성들이 농번기에 일하게 되자 고당륭과 함게 상소를 올렸지만 조예는 듣지 않았다. 이에 양부는 어부의 관리에게 후궁의 수를 물어 그가 답하지 않자 그에게 곤장 백대를 치게 했고 조예의 딸 조숙이 태어난지 1년도 안되어 죽으면서 조예가 직접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하자 양부는 조비와 무선황후 장례식에도 참석 안 한 것을 가지고 상소를 올렸지만 조예는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매번 조정에서 모여 회의할 때마다 양부는 항상 강직함을 발휘하여 천하의 모든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간주했다. 여러 번 간언하고 언쟁하여도 황제가 듣지 않았으므로 양부는 자주 사퇴할 것을 청했지만 조예는 허락하지 않았다. 양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집에 남아있는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손자 양표가 작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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