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손 백언 陸遜 伯言]
육손의 자는 백언이며 오군 오현 출신이다. 183년에 태어나 245년에 사망한다. 육손의 원래 본명은 육의이며 대대로 강동의 호족이었다. 육손은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당조부 여강 태수 육강을 따라 임지에서 살았다. 원술은 육강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원술은 그를 치려고 하였다. 육강은 육손을 비롯한 친척들을 오현으로 돌려보냈는데 육강의 아들 육적 보다 육손이 나이가 위였으므로 육강 대신에 집안을 관리하였다.
손권이 손책의 뒤를 잇고 육손은 203년에 손권의 막부에 임명되었다. 동,서 조령사를 지내고 지방으로 나와 해창현 둔전도위가 되어 현의 정무까지 아울러 관장하였다. 그 현에 해를 이어 큰 가뭄이 들자 육손은 관청의 곡식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백성에게 농업과 양잠을 권유하고 감독하였으며 백성들은 매우 많은 혜택을 입었다.
그 무렵 오군, 회계군, 단양군에는 숲 속에 숨어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육손은 손권에게 지금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이런 사람들을 불러 모으도록 요청하였다. 회계군의 산적 우두머리 반림은 오랫동안 이 지역에 골칫거리였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붙잡지 못했다. 육손이 새로 불러 모은 병사들을 데리고 험준한 곳까지 깊숙이 틀어가자 이르는 곳마다 투항하였다.
파양군의 도적 우돌이 난리를 일으키자 육손을 그들을 토벌하였다. 정위교위로 임명되고 군대를 이포에 주둔시켰다. 손권은 형 손책의 딸을 육손과 혼인시키고 당대의 정치 문제에 관해 여러 차례 의견을 구하였다. 육손은 산월을 토벌하여 그들의 세력을 흡수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손권은 의견을 받아들이고 육손을 장하우부독으로 임명했다. 단양군에 비잔이라는 자가 조조로부터 인수를 받아 산월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육손이 진압을 하러 갔지만 그의 군대는 비잔의 군대에 비해 열세였다 하지만 육손은 꾀를 내어 군기를 늘리고 군고와 호각을 배치시켜 놓으며 밤에 산골짜기에 매복해 있다가 갑자기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가며 허장성세를 하니 지레 겁을 먹은 비잔의 무리는 순식간에 격파되어 흩어졌다.
육손은 동방의 단양군, 신도군, 회계군에서 부대를 편성하고 수만 명의 군사를 얻었다. 오랜 세월 지속된 환란은 잠잠해졌으며 군대가 지나간 곳은 깨끗해졌다. 육손은 돌아와 무호에 주둔하였다. 회계태수 순우식은 질투심에 육손이 제멋대로 백성을 취하여 관할 지역을 소란스럽게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육손은 뒤에 도상으로 가서 손권과 말할 때 순우식이 훌륭한 관리라고 칭찬했다. 손권이 고발한 사람을 칭찬한 것에 대해 이유를 묻자 육손은 “순우식의 뜻은 백성을 기르려는 것이므로 저를 고발했습니다. 만일 제가 다시 순우식을 비방한다면 성덕을 어지럽히게 됩니다. 이러한 기풍을 조장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손권은 육손에게 훌륭한 행위라며 그를 칭찬하였다.
219년 여몽이 관우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병을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왔는데 육손은 여몽을 방문하여 국경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따졌다. 이에 여몽은 진실로 자신의 병이 심하다고 하자 육손은 여몽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퍼트리면 관우가 방심할 것이라 하였다. 여몽은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대적하기 어렵고 쉽게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 손권이 여몽을 대신할 후임을 누구로 삼는 것이 좋겠냐고 묻자 여몽은 손권에게 육손이 관우를 대적할 후임이라고 말하였다. 손권은 육손을 불러 편장군 우부독으로 임명하고 여몽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육손은 육구에 이르러 관우를 한껏 치켜 올리는 편지를 보냈고 관우는 육손의 편지를 살펴보고 그가 겸손하게 몸을 낮춰 스스로 의탁하려는 뜻이 있고 매우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더 이상 경계하는 바가 없어졌다. 육손은 이런 상황을 손권에게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관우를 잡을 수 있는 요령을 말했다. 손권은 은밀히 서쪽으로 군사를 보내고 육손과 여몽을 선봉 부대가 되게 하여 공안과 남군을 재빠르게 점령하도록 했다.
육손은 곧장 진군하였고 그는 의도 태수를 겸하며 무변장군으로 임명되고 화정후로 봉해졌다. 유비의 의도 태수 번우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각 성의 관리나 이민족의 우두머리가 모두 투항하였다. 육손은 막 귀순한 사람들에게 관인을 주었다. 육손은 장군 이이와 사정 등을 보내 촉나라 장수 첨안과 진봉을 치게 하였다. 이이는 수군을 지휘하고 사정은 보병을 이끌고 가서 험한 요새를 끊어 곧바로 첨안 등을 무찌르고 진봉을 사로 잡았다. 방릉 태수 등보와 남향 태수 곽목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
자귀현의 호족 문포와 등개 등은 이족의 병사 수천 명을 규합해 서쪽의 촉과는 머리와 꼬리가 되었다. 육손은 사정을 보내 문포와 등개를 토벌하도록 하였고 사정은 그들을 무찔렀다. 문포와 등개가 달아나자 촉나라에서는 이들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육손이 사람을 보내 이들을 회유하자 문포는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투항했다. 손권은 육손을 우호군 및 진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승진시켜 누후로 봉했다. 그때 형주의 사인들이 막 오나라로 귀의했는데 관직에 오른자도 있고 안배를 받지 못한 자도 있는데 육손은 상소를 올려 그들에게 기회를 줄 것을 청하니 손권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222년 (황무 원년)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침공하였다.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주연, 반장, 송겸, 한당, 서성, 선우단, 손환 등에게 5만 명을 지휘하여 막도록 하였다. 유비는 무협과 건평에서부터 이릉 경계까지 이어 수십 개의 둔영을 세우고 소수민족을 회유하였다. 그리고 장군 풍습을 대독으로 삼고 장남을 선봉으로 삼았다. 보광, 조융, 요순, 부융 등은 각각 별독으로 삼고 우선 오반을 보내 수천 명을 인솔하여 평지에 군영을 세워 도전하게 했다.
오나라 장수들이 공격하려 하자 육손은 적의 계략을 의심하여 잠시 살펴보게 하였다. 육손 수하의 장수들은 “유비를 친다면 처음 병사를 내었을 때 쳤어야 하고 서로 대치한지 7,8개월이나 되어 많은 요충지는 유비가 지키고 있어 치면 불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육손은 “유비가 교활한 적으로 매우 많은 일을 겪었고 그 군대가 처음 집결했을 때 그의 생각은 조밀하고 전일하였으므로 침범할 수 없었다. 현재는 매우 오랫동안 출병하여 우리의 편의를 차지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지치고 사기가 떨어졌으며 새로운 계책이 없으니 앞뒤에서 협공하여 적을 잡을 때는 바로 오늘이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육손은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화공으로 무너뜨리도록 명령하였는데 순식간에 형세가 이루어지자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한꺼번에 함께 공격해 장남, 풍습 및 호왕 사마가 등의 머리를 베었고 진영 40여 곳을 무너뜨렸다. 유비의 장수 두로와 유녕 등은 달아날 길이 없자 항복을 요청하였고 유비는 마안산에 올라 주위에 군대를 포진시켰다. 육손은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이곳으로 육박해 오자 유비의 진영은 무너지고 와해되었으며 죽은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유비는 밤을 틈타 겨우 백제성으로 달아났다.
유비가 백제성에 머물러 있자 서성, 반장, 송겸 등은 각각 다투어 표를 올려 유비를 반드시 붙잡을 수 있다며 다시 치고 싶어했는데 손권은 이를 육손에게 물었다 육손은 주연과 낙통과 함께 조비의 남하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래지 않아 위나라 군대는 정말 출병하였고 오나라는 삼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유비가 사망하고 아들 유선이 뒤를 잇자 제갈량이 정권을 잡았으며 손권과 다시 화해하였다. 그 무렵 정사의 마땅한 바에 근거하여 손권은 육손을 통해 제갈량에게 설명하도록 하고 아울러 손권의 인새를 새겨 육손의 관소에 두었다. 손권은 유선이나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언제나 육손이 보게 하여 말투의 경중이나 시비의 타당성에 합당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곧바로 고치게 한 다음 봉인하여 보냈다.
228년 (황무 7년) 손권은 파양 태수 주방에게 위나라 대사마 조휴를 속이게 하였다. 조휴는 주방의 거짓 투항에 속아 환현까지 들어왔는데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아 조휴를 맞아 싸우게 하였다. 조휴는 뒤늦게 적의 계책을 알아차렸지만 자신이 속은 일이 부끄럽고 우세하다는 것을 의지하여 육손과 싸웠다. 육손은 중앙 군대를 지휘하고 주환과 전종에게 왼쪽과 오른쪽 날개가 되도록 하여 세 갈래 길로 함께 나아가 조휴의 복병과 과감히 부딪혀 달아나는 조휴의 병사들을 추격해 곧장 협석까지 갔다. 조휴의 군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수가 만여 명에 달했고 수레 1만대의 물자를 노획하였다. 조휴가 돌아간 뒤 등에 종기가 나서 사망하였다.
육손은 각 군대를 정돈하여 무창을 지났는데 손권이 주위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자기 우산 덮개로 육손을 가리고 궁궐 문을 드나들게 했다. 육손에게 하사한 것은 모두 자신이 쓰는 상등의 진귀한 물품이었는데 그 당시 육손과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229년 육손은 상대장군 및 우도호로 임명되었다. 손권이 건업을 순시하고 태자,황자 및 상서 구관을 머물게 했는데 육손을 불러 태자를 보좌하도록 하고 아울러 형주와 예장 등 세 군위 일을 관장하며 군사일이나 나랏일을 관리 감독 하도록 했다.
당시 건창후 손려가 전당 앞에 투압란을 만들었을 때 육손이 정색하며 말하니 손려는 곧 그 것을 부수고 철거했다. 야성교위 손송이 손권의 친애만 믿고 병사들을 놀리며 훈련시키지 않으니 육손은 수하 관리들의 머리를 깍는 형벌에 처했다. 남양의 사경이 유익의 형벌을 우선하고 예절을 뒤에 해야한다는 견해를 칭찬하자 사경을 질책하며 현재의 법이 너무 엄하고 상세하여 평민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며 가벼운 형벌의 경우에는 한고조와 진평의 경우처럼 조그만한 과실은 용서해주고 다시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하였다.
손권이 이주와 주애주를 취하려고 할 때 육손은 말렸지만 손권은 듣지 않고 정벌하러 갔지만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보충하지 못했다. 233년에 공손연이 맹약을 위반하자 손권은 가서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육손이 말리자 손권은 의견을 받아들인다.
234년 (가화 5년) 손권이 합비 신성을 공격할 때 육손과 제갈근에게 양양을 치도록 하였다. 육손은 신임하는 한편을 보내 표문을 갖고 손권에게 전쟁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한편은 돌아오는 길에 면중에서 적을 만나 붙잡히고 말았다. 제갈근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서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퇴각할 것을 권했지만 육손은 답장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재촉하여 순무와 콩을 심게 하였으며 장수들과 보통 때처럼 바둑을 두고 활쏘기 놀이를 하였다. 그 와중에 육손은 은밀히 제갈근과 계획을 세워 제갈근은 배를 저어 점차 나아가고 육손은 천천히 대오를 정돈하면서 세력을 과장되게 나타내어 퇴각하니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대군이 백위에 다다르자 육손은 사냥하러 간다고 말하고서 은밀히 장군 주준과 장량 등을 보내 강하군의 신시, 안륙, 석양을 치게 했다. 석양의 시장이 한창 시끄러울 때 주준 등이 엄습해 왔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물건을 버리고 성으로 들어가려했다. 성문이 닫혀 있으니까 적군은 직접 자기 백성을 죽이고 나서 성문을 열었다. 오나라 군대가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모두 10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사로잡힌 자들은 모두 구호를 받았으며 사병들로 하여금 침범하거나 속이지 못하도록 했다. 가족들을 데리고 투항해 온 자들에게는 사람을 시켜 여러 방면으로 돌보아 주게 했다. 만일 처자식을 잃었으면 곧바로 옷과 식량을 주고 두텁게 위로하여 돌려보냈는데 어쩌다 감동하여 우러르며 서로 손을 잡고 되돌아오는 이도 있었다. 강하의 공조 조탁, 익양의 유비군 대장 배생, 이인의 우두머리 매이 등은 모두 수하의 무리를 이끌고 육손에게 와서 귀의했다. 육손은 재물과 비단을 기울여 이들을 돌아보고 보살폈다.
위나라 강하 태수 녹식은 병마를 관리하는 권한을 쥐고 늘 오나라의 변방 지역을 소란스럽게 하면서 위나라의 문빙과 아들 문휴와 오랫동안 화합하지 못했다. 육선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는 곧바로 녹식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려 한다는 소문을 위나라에 흘리니 녹식은 두려워서 직접 처자식을 호송하여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녹식의 관리와 병사들은 그에게 귀의 하지 않았으므로 면직되었다.
237년 (가화 6년) 중랑장 주지가 파양에서 병사를 불러 모으자고 요청하자 손권은 육손에게 물었는데 육손은 백성은 쉽게 동요하고 안정되기 어려우므로 소집에 응하도록 할 수 없으면 아마 도적이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지는 병사를 모집하기를 간곡히 청하였는데 그 군의 오거 등은 정말 도적이 되어 주지를 죽이고 여러 현을 함락시켰다. 예장군과 여릉군에 옛날부터 있던 사악한 백성은 함께 오거에게 호응하여 도적이 되었는데 육손은 소식을 듣자마자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오거등은 항복하였고 육손은 정예 병사 8000여 명을 얻었고 세 군을 평정했다.
그 무렵 중서전교로 있던 여일이 요직을 훔쳐 차지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위세와 복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육손은 태상 반준과 함께 마음속으로 걱정하여 이 일을 말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뒤에 손권이 여일을 주살하자 깊이 자책했다. 그 때 사연과 사굉 등이 사업을 일으키려 하자 육손은 백성들을 구제한 다음에야 가능하다며 다시 생각하라고 조언하였다.
244년 (적오 7년) 육손은 고옹 대신 승상에 임명되었다. 이보다 앞서 손패파와 손화파가 서로 대립하며 서로 세력을 키워나가는 이궁의 변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전종은 자신의 아들 전기에게 손패를 따르게 하여 이러한 사실을 육손에게 보고하자 육손은 전종을 비난하였다. 하지만 전씨 일가는 육손의 말을 무시하고 손패를 지지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육손은 전종에게 경고했지만 전종이 육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 오히려 다시 틈이 벌어졌다. 육손은 직접적으로 후계자 문제에 끼어들어 손화를 확실하게 태자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손권은 그의 의견을 듣고도 따르지 않았다. 육손의 외식인 고담, 고승, 요신이 모두 손화에게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육손은 무고죄를 받아 쫓겨났다. 245년 손권이 궁궐 안의 사자를 자주 보내 육손을 꾸짖자 육손은 화가 나서 탄식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그 때 나이 63세였고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육손의 맏아들 육연이 요절했으므로 차남 육항이 작위를 이었다. 손휴가 제위에 있을 때 육손을 추증하여 시호를 소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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