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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255. 등애 사제

[등애 사제 鄧艾 士載]

 

등애의 자는 사제이며 의양군 조양현 출신이다. 생년 미상이나 264년에 사망한다 등애는 어려서고아가 되었으며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였을 때 여남으로 이사하여 농부가 되어 송아지를 키웠다. 12살 때 어머니를 따라 영천에 이르러 태구현의 장 진식의 비문을 읽고 등애는 스스로 이름을 범으로 바꾸고 자를 사칙이라 했다. 후에 종족 중에서 그와 이름이 같은 자가 있는 것을 알고 다시 개명하게 된다.

 

등애는 도위학사로 임명되지만 가난하여 간좌도 할 수 없어서 도전수총초리가 되었다. 같은 군 관리의 부친이 그의 집을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기고 매우 후하게 재물을 주었지만 등애는 전혀 감사의 뜻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높은 산과 큰 못을 볼 때마다 군영을 설치하기에 적당한 지를 헤어려 그림으로 그렸는데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비웃었다. 후에 전농강기가 되었으며 상계리가 되었는데 이 덕에 태위 사마의를 만날 수 있었다.

 

사마의는 등애의 재주를 알아보고 속관으로 임명하고 상서랑으로 승진시킨다. 등애는 보급과 물자 운영에 재능이 있어 당시 상황을 파악하게 하고 등애에게 수춘까지 파견하여 시찰하도록 하였다. 등애는 오나라를 상대 하기 위해 허창에서 군량을 보급할 수 있도록 운하를 판 후 이 주변에 둔전병을 두고 경작과 방비를 시키자고 제안하는 제하론을 올리게 되는데 사마의는 그의 진언을 동의하고 시행하게 한다.

 

241 (정시 2) 운하가 개통되었고 동남쪽에 일이 발생할 때마다 대군을 출동하여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 장강과 회수에 도착하였으며 물자와 식량이 회복되고 수해가 없었다. 등애는 지방으로 나가 정서장군의 군사가 되고 남안태수로 승진한다. 294년 강유가 국산에 성을 쌓고 구안과 이흠에게 지키게 하였는데 진태는 서질과 등애를 인솔하여 성의 보급로를 끊었고 진태와 곽회를 따라 구원하러 온 강유의 군대를 막아내자 구안과 이흠은 위나라에 투항한다. 강유가 물러난 틈을 타서 곽회는 서쪽에 강족까지 공격하러 하자 등애는 적군이 아직 멀리 물러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일을 대비한다고 하며 만류하였다. 이에 사마의는 등애를 백수 북쪽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강유는 요화를 파견하여 백수 남쪽에 등애를 향해 진을 구축하여 대치시키고 강유는 조성을 공격하려 하였지만 이를 눈치챈 등애가 먼저 조성에 도착하여 강유군을 막아낸다. 이 공로로 등애에게 관내후 작위를 내리고 토구장군을 더하였으며 후에 성양 태수로 임명한다.

 

당시 병주의 우현왕 유표가 흉노를 병합하여 하나의 부락으로 만들자 등애는 변방을 제어할 계책을 올렸는데 대장군 사마사는 이제 막 정치를 보좌하기 시작한 등애의 건의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등애를 여남태수로 전임시켰다. 등애가 여남에 이르러 과거에 자신을 후하게 대해 줬던 관리의 아버지를 수소문하여 찾았지만 돌아가신 지 오래였으므로 관리를 보내 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충분한 선물을 보내주었으며 그의 아들을 추천하여 계리로 임명했다.

 

제갈각이 합비 신성을 포위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등애는 사마사에게 손권이 사망하고 왕권이 탄탄하지 않은 오나라는 참패하고 온 제갈각에게 죄를 물을 것이라 하였는데 예상대로 제갈각은 귀국 후에 주살되었다. 등애는 연주자사로 옮겼으며 진위장군을 더했다. 등애는 표를 올려 전쟁보다 농업을 주력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조모가 제위에 오르자 등애는 승진하여 방성정후에 봉해졌다.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고 달리기를 잘하는 병사를 파견하여 서신을 보내 백성을 혼란에 빠뜨리려 하자 등애는 그 사자를 죽이고 아울러 신속히 군대를 나아가게 한 다음 우선 악가성으로 달려가 부교를 만들었다. 사마사가 도착하여 그대로 악가성을 점거했고 문흠의 대군이 위나라 대군보다 늦게 왔으므로 성 아래에서 패배했다. 등애는 그를 병두까지 뒤쫓아가자 문흠은 오나라로 달아난다.

 

오나라 대장군 손준이 10만 대군이라 외치며 장강을 건너려는 형세를 나타냈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를 보내 비양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등애는 적군과 멀리 떨어져있는 요해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신속하게 부정으로 옮겨 주둔하였고 태산 태수 제갈서를 여장으로 파견해 맞서 싸우도록 하여 적을 패퇴시킨다.

 

255 (정원 2) 등애는 장수교위로 임명되고 문흠을 격파시킨 공로로 방성향후로 봉해지고 안서장군을 대행한다. 등애는 적도에서 포위당한 옹주자사 왕경을 구원하였고 강유는 물러나 종제에 주둔했다. 등애는 안서장군으로 임명되고 가절영호동강교위가 되었다. 이 때 위나라 장수들은 강유의 병력이 다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등애는 적군은 교활하고 책략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이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강유는 기산으로 향했는데 등애가 방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정으로 돌아가 남안으로 진군했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하고 강유와 대치하였다. 강유는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날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 상규로 달려갔다. 등애는 강유와 단곡에서 교전하여 크게 무찌른다.

 

257 (감로 2) 등애는 사마망과 함께 장성으로 쳐들어온 강유에게 대응하지 않고 방어하자 강유는 물러나 돌아갔다. 등애는 정서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258년에는 후화에서 강유를 격파하였고 강유는 퇴각하여 답중을 지켰다.

 

263 (경원 4) 사마소는 대대적으로 촉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사마소는 등애로 하여금 강유와 전선에서 대치하도록 하고 옹주 자사 제갈서에게 강유의 퇴로를 끊어 강유가 돌아갈 길이 없도록 하게 하였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를 파견하여 직접 강유의 진영을 공격했고 농서태수 견홍을 보내 강유 군대의 앞에서 싸우고 하고 금성태수 양흔에게는 감송으로 가도록 했다. 강유는 종회의 군대가 한중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물러난다. 양흔은 강천구까지 추격하여 큰 싸움을 하였고 강유는 패배하여 달아났는데 제갈서가 벌써 길을 막고 교두의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함곡으로부터 북쪽 길로 들어가서 옹주 후방을 공격하려 하였다. 제갈서는 이 소식을 듣고 퇴각하여 30리를 돌아갔다. 강유가 제갈서가 퇴각했다는 사실을 듣고 교두를 통과하였고 제갈서는 급히 강유의 퇴로를 차단했지만 하루 차이로 놓치고 만다.

 

강유는 병사를 물려 검각을 지켰는데 종회가 강유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등애는 음평길로부터 사람이 없는 땅을 700여리 행군하였다. 산을 뚫어 길을 내고 계곡에 다리를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므로 작업은 매우 어려웠고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등애는 모전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산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서로 이어서 전진하였다. 선두 진영이 강유에 도착하자 촉나라 수비 대장 마막이 항복했다. 촉나라 위장군 제갈첨은 부성에서 면죽으로 돌아와 진영을 나란히 정렬하고 등애를 기다렸다. 등애는 아들 등충에게 오른편에서 출격하도록 하고 사마 사찬 등에게는 적의 왼편에서 출격하도록 했다. 등충과 사찬은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하고 적을 공격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등애는 화를 내머 곧 등충과 사찬을 질타하고 목을 베려하였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가 적과 싸워 크게 격파시키고 제갈첨과 장준의 머리를 베고 낙성까지 진군했다. 촉나라 황제 유선이 사자를 보내 황제의 옥새와 인수를 받들고 등애에게 편지를 써서 투항하기를 청했다.

 

등애가 성도에 도착하자 유선은 태자와 제왕과 대신 60여 명을 이끌고 결박한 채로 군문에 출두했다 등애는 부절을 쥐고 결박을 풀고 관을 태우고 그들을 받아들여 용서했다. 등애가 촉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을 조사하여 약탈한 일이 없고 항복한 자를 받아들여 위로하고 옛 사업을 회복시켰으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등애를 칭찬했다. 등애는 후한 초기 등우의 이전 일에 따라서 전권을 발휘하여 유선을 표기장군을 대행하고 태자를 봉거도위로 제왕을 부마도위로 임명했다. 신하들은 각자 지위 고하에 따라 왕으로 임명되었고 간혹 등애 수하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등애는 촉나라를 정벌하고 촉나라 신하들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며 강유는 영웅이지만 나를 만나 곤궁했다고 하며 자만하자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종회, 호열, 사찬 등은 모두 등애를 모함하고 등애의 행동은 반역에 해당하며 변란의 징조가 있다고 아뢰었다. 조서가 내려와 죄인을 수송하는 수레로 등애를 불렀다. 종회는 위관을 보내 등애를 잡아들이게 했고 등애는 잠을 자다가 새벽녂에 아들 등충과 함께 위관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함거에 갇혔다.

 

종회와 강유가 함께 반란을 일으키다가 피살된 후 등애의 부하들은 함거를 부수고 등애를 구출했다. 위관이 전속 등을 파견하여 등애를 토벌하도록 하니 면죽 서쪽에서 등애를 죽였다. 아들 등충은 등애와 함께 죽었고 낙양에 있는 나머지 아들들도 전부 살해되었다. 등애의 처와 손자는 서역으로 옮겨 살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