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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268. 공융 문거

[공융 문거 孔融 文擧]

 

공융의 자는 문거이며 노국 출신이다. 153년에 태어나 208년에 사망한다. 공융은 공자의 자손으로 건안칠자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남윤이었던 이응은 방문객을 선별하여 통과시키고 있었는데 공융이 10세 때 이응을 찾아가 문지기에게 선대부터 친교가 있던 가문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응이 이유를 묻자 선조 공자는 당신의 선조 이로군의 제자이면서 친우였다. 따라서 당신과는 수대에 걸쳐 돈독한 사이다고 말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뒤에서 진위가 이 말을 듣고 어릴 때 영리하다고 해서 어른이 되어서 우수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하자 공융은 말씀 하신 대로라면 당신은 어릴 때 필시 뛰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대답하여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공융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지냈다. 도의를 지나칠 정도로 다하였는데 공융은 사람이 부축하지 않으면 똑바로 서지 못할 만큼 건강을 헤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공융의 효심에 감탄하였다. 16세 때 공융의 형인 공포의 친구 장검이 당대의 권력자였던 중상시 후람의 비리를 고발하였지만 오히려 역으로 모함을 받아 공포에게 도망쳤다. 당시 공포는 부재중이었고 공융이 집에 있었다. 이 사건은 2차 당고의 금과 연결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는데 장검은 공융이 어렸으므로 상황을 모르리라 생각하여 사정을 말하지 않은채 떠나려 하였다. 하지만 공융은 이를 눈치채고 형 대신 장검을 숨겨주었다.

 

후에 공융이 장검을 숨겨준 것이 발각되었는데 장검은 도망쳤고 공융과 공포는 조사를 받기 위해 체포되었다. 체포되었을 때 공융은 자신이 장검을 받아들였으니 형 공포는 이 일과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공포는 장검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니 공융과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공융 형제의 어머니는 집안의 주인이자 연장자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서로 자신이 책임을 지려 하였기 때문에 결국 판결을 내리지 못해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결국에는 형 공포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조서가 내려왔기 때문에 공융은 살아남게 되었다.

 

사도 양사의 추천을 받아 공융은 사도부의 속관으로 재직하였는데 관리들의 부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환관과 그 친족들의 비리를 산더미만큼 적발하였다. 공융의 보고서를 받자 상서는 환관들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결제해주지 않고 공융을 꾸짖었지만 공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채 환관들의 비리를 진술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하진이 하남윤에서 대장군으로 승진하였는데 사도 양사는 공융을 시켜 그에게 축하인사를 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공융은 하진을 만날 것을 거부하고 공융은 그 즉시 사도부로 돌아가 하진을 탄핵한 뒤 고향으로 떠난다. 하진은 이 일을 수치스럽게 여겨 자객을 고용하여 공융을 죽이려 하였지만 오히려 사대부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공융을 포섭하려 하였기 때문에 공융은 무사할 수 있었다. 왕윤이 예주에서 황건적과 싸울 때 공융은 그의 부장이 되어 종군하였다. 이후 하진은 공융을 시어사로 천거했지만 공융은 어사중승 조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에 다시 사공부에 벽소되어 종군후에 임명되었다가 재직한지 3일 만에 호분중랑장으로 승진한다.

 

십상시의 난 이후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자 공융은 황제를 폐위하려고 하는 동탁에게 늘 바른 말로 반박하여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의랑으로 좌천되었다. 당시 황건적이 다시 거병하여 여러 주에서 소란스럽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청주의 북해국의 황건적 세력이 강성하였다. 동탁은 공융을 북해상으로 임명하여 북해로 보낸다. 공융은 북해로 부임하여 황건적을 방비하니 황건적의 수령이었던 장요는 식량을 약탈하지 못하고 기주로 돌아갔다. 공융은 역습을 하여 적을 패주시키고 각 현을 수복시켰다.

 

황건적이 다시 침략해오자 공융은 군사를 이끌고 나와 도창에 주둔하다가 관해에게 포위당하여 위기를 겪게 되었지만 당시 평원의 상이었던 유비의 구원으로 관해를 격파하였다. 황건적에게 파괴된 마을 재건에 힘쓰고 교육을 존중하여 학교를 설치하기도 하며 현자를 불러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이상에 치우쳐 정치와 현실이 서로 부합하지 않은 일이 많았었는데 196년에 세력을 점차 넓혀가던 원소와 충돌하였는데 원소를 원담을 보내 청주자사 전해가 격파하였다. 공융은 원담을 맞아 전투를 하였지만 수 개월 교전 끝에 공융은 거듭 패배하여 농성하였지만 성이 함락되고 탈출하였지만 공융의 가족들은 모두 원담에게 포로로 잡혔다.

 

당시 조조가 헌제를 막 옹립하였을 때였기 때문에 헌제는 직접 조서를 내려 공융을 불렀고 공융은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공융은 장작대장에 천거되었다가 다시 소부로 전임하였다. 원소와 조조가 대장군 직을 두고 대립하였을 때 조조는 결국 원소에게 대장군 직을 양보하였는데 공융은 지절을 받아 업으로 가서 원소에게 대장군 작위를 수여하는 칙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조와 원소의 세력이 커져 서로 대치할 때 공융과 순욱은 원소와 상대가 될 지에 대해 설전을 펼쳤는데 공융은 원소의 세력이 강대하고 전풍, 저수 등의 훌륭한 책사들과 안량, 문추와 같은 용장이 있기 때문에 이기기 힘들 것이라 하였다. 순욱은 이에 반박하여 원소의 세력이 강대하지만 군법이 정비되지 못한점과 책사들의 허점을 이야기 하였고 안량, 문추에 대해서도 필부의 용맹이 있으니 한번의 싸움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하며 공융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공융은 헌제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조조에게는 결코 복종하지 않았고 매우 비판적으로 대했다. 조정에서 조회를 열 때마다 늘 정론을 펼쳐 의견을 주도했고 대부분 사람들이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후에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켰을 때 조비가 원희의 부인이었던 문소황후를 빼앗아 강제로 처를 삼은 것에 대해 무왕은 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조조와 조씨일가를 조롱하였다. 또한 오환 정벌 중에 군량이 모자라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이에 대해 공융은 걸왕과 주왕은 여색으로 나라가 멸망했는데 어찌하여 결혼을 금지하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조롱하였다.

 

결국 208년 조조는 공융과 사이가 나빴던 치려를 어사대부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조조가 공융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치려는 관직을 이용해 공융의 죄를 날조하여 고발하였고 공융은 파직되었다. 조조는 표면적으로는 치려와 공융을 중재해주는 척 회유하였지만 공융이 고분고분하게 따르려 하지 않자 불효죄라는 죄목으로 트집을 잡아 공융을 처형하고 삼족을 멸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