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녕 흥패 甘寧 興覇]
감녕의 자는 흥패이며 파군 임강현 사람이다. 생년은 미상이나 사망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215년으로 보인다.
감녕은 어려서부터 기개가 있고 의협심이 강해 무뢰한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은 무리를 이루어 서로 따랐고 활과 화살을 지니고 깃털을 등에 꽂고 방울을 허리에 찼다. 백성들은 방울 소리를 듣고도 감녕인 것을 알았다.
감녕은 패거리를 이끌고 지역 자경단과 같은 행동을 하였고 범죄사건 등이 일어나면 그들은 범인 체포와 처벌을 행했다. 감녕은 사람들과 만나거나 조정의 관리들을 만날 때 존중하고 후하게 대접하는 자와 함께 즐기고 그렇지 않은 관리에게는 부하들을 시켜 재산을 약탈하게 하는 등 방약무인으로 날뛰었다.
그렇게 20년은 지속하다가 이후에 그는 이러한 행위를 그치고 제자백가의 책을 가까이하여 부하 수백 명을 데리고 유표를 따른다. 하지만 문사를 중시하는 유표는 감녕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고 그에 불만을 가진 감녕은 오나라로 가고자 했지만 강하태수 황조가 하구를 막고 있어 지나가지 못하여 황조를 따랐다. 황조 역시 감녕을 중용하지 않았다.
손권이 황조를 토벌하자 황조는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나는데 오나라 병사들이 추격하니 황조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평소 활을 잘 쏘던 감녕이 활을 쏘아 능조를 죽여 황조를 구하는 공을 세우긴 하였지만 여전히 황조는 감녕을 홀대하였다. 황조의 도독 소비는 수차례 감녕을 천거하였지만 황조는 오히려 사람들을 시켜 감녕의 빈객들을 유혹하여 도망치게 하였다. 감녕 역시 떠나고 싶었지만 붙잡힘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 떠나지 못한 체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감녕의 마음을 이해하던 소비는 감녕을 주현의 현장으로 삼을 수 있게 황조에게 말하는 한편 원하거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다.
소비의 도움을 받은 감녕은 다시금 수백 명의 세를 만들어 오나라에 귀순했다. 감녕은 주유와 여몽의 천거를 받아 손권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감녕은 황조 토벌을 진언하였고 장소가 반대하였지만 감녕은 장소를 소하와 빗대며 비유하며 반박하였고 결국 손권은 감녕의 손을 들어주었다.
손권은 황조를 공격하여 결국 황조를 사로잡고 그의 병사들도 모두 붙잡았다. 손권은 곧 감녕에게 병권을 주고 당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이 때 손권은 황조와 함께 소비도 처형하려 하였지만 감녕은 주연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소비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의 귀순한 것을 이야기하며 소비의 은혜를 갚았다.
이후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무찌르는데 활약하는 한편 남군에서 조인을 공격하는데 참가하였다. 남군이 쉽게 공략되지 않자 감녕은 이릉으로 진군하여 점령할 것을 진언하는 한편 성을 얻고 굳게 지켰다. 그 당시 감녕에게는 수 백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새로 합류한 병사까지 1천 명을 채웠다. 조인은 5~6천 명의 병사들에게 감녕을 포위할 것을 명령하고 공격하게 하였지만 감녕은 이를 지켜냈고 사자를 보내 주유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써서 장수들을 인솔하여 포위를 풀었다.
후에 손권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탈취한 일로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으로 진군하여 관우에게 대항했다. 당시 관우는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 중 정예 5천명을 가려내어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고 하였다. 감녕은 병사 3백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노숙에게 5백명의 병사를 요청하여 관우에게 대항하겠다고 말하니 노숙은 병사 1천명을 선발하여 그 날 밤에 가니 관우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감녕은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 하며 강을 건널 시에는 반드시 사로잡겠다고 자신했다.
소식을 들은 관우는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 양신, 하이 투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감녕은 환현 공격해 참가하여 승성독이 되었다. 감녕은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 장사들의 선봉이 되어 주광을 격파시키고 포로로 잡았다.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 여몽의 공이 가장 컸고 감녕의 공이 다음이었으므로 절충장군으로 제수되었다.
후에 유수구 전투에서는 감녕이 전부독이 되어 적 앞의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손권은 특별히 쌀과 술, 많은 안주를 하사하였는데 감녕은 이 것을 수하 1백여 명에게 내려 먹도록 했다. 감녕은 병사 1백 명으로 조조군에 기습을 가해 대혼란을 일으킨 후 승리하는데 감녕은 이 공로로 더욱 중시되었다. 손권은 조조에게 장료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녕이 있다며 크게 칭찬하였다.
감녕은 비록 사납고 살생을 좋아했지만, 호방하고 맑은 성정과 계략이 있었다. 그는 재물을 경시하고 장사들을 존중했다. 유능한 인물을 후하게 대우했으며 병사들을 훈련시키니 병사들 또한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215년 (건안 20년)에는 합비 공격에 참가하였다. 마침 역병이 유행하여 군대는 모두 물러났고 오직 수레 아래의 호사 1천여 명과 여몽, 장흠, 능통 및 감녕이 손권을 따라 소요진 북쪽에 있었다. 장료는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관찰하고 즉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기습하였다. 감녕은 적에게 화살을 쏘았으며 능통 등도 필사적으로 싸웠다.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 때문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를 질렀고 그의 모습은 웅장하고 강인했다고 한다.
정사에서는 215년의 기록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215년에 사망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연의에서는 이후 이릉전투 때 촉군의 장수 사마가가 쏜 화살에 맞고 사망하였다고 나오고 있으나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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