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현덕 劉備 玄德]
유비의 자는 현덕이며 탁군 탁현 출신이다. 161년에 태어나 223년에 사망한다. 유비의 키는 약 173cm이고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았다. 귀는 남달리 크고,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귓 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유비는 전한시대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이다. 유승의 아들 유정이 탁현의 육성정후로 봉해졌지만 주금을 조금 바쳤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 당하였다. 할아버지 유웅과 아버지 유홍은 대대로 주군에서 일하였고 유웅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동군 범현의 현령이 되기도 하였다.
유년 시절
유비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돗자리를 엮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5장 높이의 뽕나무가 있어 가마 덮개 처럼 보였는데 ‘이 집에서 귀한 인물이 나올 것’이란 예연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 시절 유비도 이 나무에 올라가 놀면서 ‘나도 이런 덮개가 달린 가마 탈거야’하고 말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작은아버지 유자경이 “허튼소리 하지 마라 우리 가문이 멸망할 수도 있다”라는 식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유비가 15세에는 어머니가 공부를 배우게 하여 유비와 같은 종중인 유덕연과 공손찬과 함께 노식의 제자가 되었다. 유덕연의 아버지인 유원기는 늘 유비에게 학비를 대 주고 아들 처럼 대해 주었다. 유비는 공손찬과 우정을 쌓았고 공손찬이 연장자여서 형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유비는 독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락이나 음악, 의복 걸치는 데에 몰두했다. 유비는 말수가 적고 늘 남에게 공손히 대하는 등 검정을 겉으로 들어내지 않았고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 들이 앞다투어 유비의 밑에 모여 들었다. 그 가운데 젊은 관우와 장비도 있었는데 이 세사람의 깊은 관계를 [삼국지 연의] 첫 장면에서 도원결의로 의형제가 되는 모습이 나온다.
황건적의 난
중산의 상인 장세평과 소쌍등은 자신들이 모은 재산을 갖고 탁군 일대에서 말을 사려다가 유비를 보고 뛰어난 인물이라 여겨 그에게 많은 돈을 주었고 유비는 이 돈으로 무리를 모았다. 그러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동료들을 이끌고 추정의 군대에 가담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장거와 장순의 난에서도 공을 세워 안희현의 위에 임명 된다.
군의 독우가 왔을 때 유비가 면회를 신청하지만 독우는 아프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는다. 그래서 유비는 독우의 숙소로 쳐들어가 그를 포박한 다음 곤장 200대를 때렸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유비가 아니라 장비가 매질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관직을 버리고 오래지 않아 대장군 하진이 도위 관구의를 파견하여 단양에서 군사를 모으게 하였는데 유비도 함께 따라갔다. 하비현에 이르러 적을 만났는데 함께 무찔러 공을 세운 유비는 하밀현의 승에 임명되었으나 또 다시 관직을 버린다. 그러다 고당현의 위가 되었다가 현령으로 승진했는데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이 있는 곳으로 달아난다.
공손찬 휘하 시절
공손찬은 유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와 함께 기주목 원소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유비는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잠시 평원의 현령을 대행하다 평원의 상에 임명되었다.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자 유비는 전해와 함께 제(濟)의 주둔한다. 그러던 중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도겸은 전해에게 사자를 보내 위급함을 알렸는데 전해는 유비와 함께 서주를 구원하로 간다. 이 때 유비는 사병 1천명과 유주 오환족의 속하는 부족의 기병과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다다르자 도겸은 단양의 병사 4천을 유비에게 주었고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는다. 유비는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탁한다.
서주 통치 시절
도겸은 조정에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에 주둔시킨다. 도겸의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미축, 진등 등의 권유로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196년에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으로 임명되고 의성정후로 봉해진다. 유비는 조조에게 패배한 여포를 맞아 들인 적이 있었는데 유비와 원술이 한달 넘게 대치하는 동안 여포가 빈틈을 타서 하비를 습격하고 하비를 지키던 조표가 배신하여 여포를 맞아 들인다.
유비는 군을 돌려 해서로 갔고 양봉 한섬이 서주와 양주 일대를 소란 스럽게 하자 그들을 공격해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유비는 여포에게 화해를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식을 돌려보내고 소패로 돌아온다. 유비가 소패에서 1만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려 유비를 공격했고 유비는 이 싸움에서 패배해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조조 휘하 시절
조조는 유비를 후하게 대접하고 예주목으로 삼았다. 유비는 소패 땅으로 가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집하자 조조는 유비에게 군량미를 대주기도 하였다. 그러다 여포의 장수 고순이 유비를 공격하자 조조는 하후돈을 보내 구원하게 한다. 하지만 고순에게 패배하여 유비는 처자식을 다시 여포에게 포로로 보낸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주로 들어와 정벌하였고 유비를 도와 하비성에서 여포를 포위한다. 결국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유비는 처자식을 데러고 조조를 따라 허도로 귀환하고 좌장군에 임명된다. 조조의 참모 정욱은 ‘유비는 남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니다’라고 하며 유비를 죽일 것을 권하지만 조조는 받아 들이지 않았다. 또한 헌제의 숙부인 거기장군 동승이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칙을 받고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한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당신과 나뿐이오”라고 이야기 하자 유비는 이 말을 듣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떨어 뜨린다.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나기 전에 원술을 토벌하러 갔는데 일이 발각되어 동승 등이 모두 처형된다. 유비는 조조를 떠나 하비를 근거지로 삼고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간다. 동해군 창패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현의 많은 사람이 조조를 배신하고 유비에게 의탁하였는데 수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유비는 손건을 원소에게 보내 동맹을 맺는 한편 조조가 보낸 유대와 왕충을 격파 한다.
결국 조조는 직접 유비를 토벌하고 유비의 병력을 손에 넣었고, 유비의 처자식과 관우를 포로로 잡아 허도로 귀환 한다. 유비는 패배하여 원소의 아들 원담이 있는 청주로 달아나게 된다.
원소 휘하 시절
원담은 유비를 맞이 하여 원소가 있는 업으로 가게 된다. 유비가 원소에게 머물자 뿔뿔히 흩어진 병사들이 다시 모여 들었다.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할 때 여남의 황건적 유벽이 조조를 배신하고 원소에게 호응했다. 원소는 유비를 유벽과 함께 허현 주변의 지역을 탈취하게 한다.
이때 조조에게 달아난 관우가 돌아왔다. 조조는 조인에게 군사를 주어 유비를 치게 하였다. 유비는 허현 근처를 공격하지만 조조에게 패배하여 원소에게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유비는 원소에게 벗어나기 위해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와 연합할 것을 권하고 유비는 여남에 진을 친다. 여남에서 공도 등이 항복하여 군사가 수천에 이르렀고 조조는 채양을 보내 막게 하였지만 유비에게 살해당한다.
유표 빈객 시절
조조는 원소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는 미축과 손건을 보내 유표에게 소식을 보내 유표 밑에 몸을 의지 한다. 유표는 직접 교외까지 나와 상빈의 예절로 대접하고 유비의 병력을 늘려 신야에 주둔하게 한다. 하지만 형주의 호걸 중에 유비를 의탁하는 자들이 늘어난다. 이 무렵에 제갈량을 삼고초려로 초빙히기도 한다. 유표는 유비의 마음을 의심하여 몰래 방비하였다. 그러던 중 조조의 장수 하후돈과 우금등이 박망으로 쳐들어 오자 유표는 유비로 하여금 막게 한다. 유비는 박망에서 하후돈을 격파한다.
207년 조조가 오환을 정벌하러 가자 유비는 유표에게 허창을 습격하자고 권했지만 유표는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조조가 직접 유표를 정벌할 무렵 유표는 병으로 사망한다. 유종이 유표의 뒤를 잇고 유종은 항복의 사자를 조조에게 보낸다. 유비는 번성에 주둔하고 있다 완성에 조조의 군대가 도착했을 무렵에야 조조가 쳐들어 온 것을 알았다.
유비는 군사를 이끌고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이 유비에게 유종을 치면 형주를 지배할 수 있다 하였지만 유비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양양성에서 유비가 유종을 부르자 유종은 두려워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유종의 측근과 형주 사람 다수가 유비에게 귀의했다. 유비가 당양을 지날 무렵 유비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 하루에 십여리도 갈 수가 없었다.
유비는 관우를 보내 배 수백척에 일부를 태우고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떤 이는 서둘러 유비에게 강릉을 보존하라 하였지만 유비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버리지 못하였다. 예상대로 조조는 강릉에 군수물자가 풍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비가 그 곳을 점령할까 두려워 하였다. 조조는 5천명의 기병으로 급히 뒤쫓으자 당양의 장판까지 추격했고 유비가 처자식을 버리고 제갈량,장비,조운 등 수십 기마와 도주하니 조조는 백성과 군수물자를 크게 거두어 들였다.
유비는 한진으로 달려갔는데 마침 관우를 만나 강을 건너 강하태수 유기와 함께 하구에 이르렀다. 유비는 손권과 손을 잡고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승리한다. 유비와 손권의 군대는 바다와 육지로 동시에 나아가 조조군을 추격하였고, 조조는 역병이 발생하여 사망자가 많았으므로, 조조는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삼국정립
유비는 유기를 형주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형주 남부의 4군을 정벌하러 갔다. 무릉 태수 금선, 장사 태수 한현, 계양 태수 조범, 영릉 태수 유도는 모두 항복했다. 또한 여강군의 뇌서가 부하 수만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유기가 병으로 사망하자 부하들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하였다.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하여 여동생을 시집 보내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211년 익주목 유장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 하여 유장의 별가종사였던 장송은 ‘유비를 맞아들여 한중의 장로를 토벌하면 된다’고 말하였고 유장은 법정을 유비에게 파견한다.
법정과 장송은 유비를 익주의 새주인으로 생각하였고 유장은 몸소 마중나와 부에서 유비와 회견하였다. 방통이 유장을 사로잡을 것을 진언하지만 유비가 거절한다. 유장이 유비를 행대사마겸 사예교위로 추천하고 유비 역시 유장을 행진서대장군겸 익주목으로 추천했다. 유장은 유비의 병사를 증강지켜 백수의 주둔군을 지휘하도록 한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인덕을 베풀어 인심 장악에 힘을 썼다.
조조가 손권을 침공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유비는 유장에게 1만 병사를 빌리려 하였지만 유장은 4천명만 빌려주었다. 장송은 유비에게 ‘큰일을 이루려 하는데 어찌하여 이 것을 버리고 익주를 떠나십니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장송의 형 광한태수 장숙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유장에게 이야기 하였고, 유장은 장송을 불러 목을 베었다.
유비와 유장의 사이에 불화가 생기고 유장은 관소를 지키는 장수들에게 유비와 관계를 맺지 말라고 하였고 유비는 화가나 백수군을 지키는 양회와 고패를 참살한다. 유비는 황충과 탁응등을 이끌고 부성까지 성을 점령하고 유장은 유귀,냉포,장임,등현등을 보내 부성을 막게 했지만 모두 격파되어 패배한다. 패한 유장은 면죽에 이엄을 보내면서 지키게 하였지만 이엄이 병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군대는 점점 강성해져 각 장수들을 보내 속현을 평정하였다. 관우만 형주를 지키고 제갈량과 장비 조운등은 병사를 이끌고 백제,강주,강양을 평정하였고 유비는 군사를 나아가 낙현을 포위한다.
214년 낙성을 격파하고 유비는 성도를 에워싼 지 수십일 만에 유장은 성을 나와 항복했다. 유비는 익주목을 겸하게 되었다. 215년 손권이 유비가 익주를 손에 넣은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받으려 하였다. 유비는 양주를 얻고 나면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하자 손권은 여몽을 보내 습격하여 빼앗으려 하였으나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장사,계양을 손권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되었다.
유비는 황권을 보내 장로를 맞이 하려 했지만 장로는 이미 조조에게 항복한 뒤였다. 하후연과 장합이 한중에 주둔하여 경계를 침범하여 소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유비는 장비를 파견하여 장합을 격파한다.
218년 유비는 장수들을 인솔하여 한중으로 나아갔다. 장수 오란과 뇌동을 보내 무도로 들어가게 했으나 조조의 군대에게 전멸하였다. 이에 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며 하후연, 장합등과 대치하였고, 219년에 유비가 양평관에서 내려와 정군산에 진영을 구축하자 하후연은 그 땅을 빼앗으려 하였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령해 높은 곳에 올라 혼란에 빠진 틈에 공격하여 하후연과 조조가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등을 참수했다.
조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자 유비는 요새에 의지한 채 싸우지 않았다 조조는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되돌아갔고 유비는 유봉,맹달,이평등을 보내 상용군에서 신탐을 공격했다. 조조와의 한중공방전에서 승리한 후 유비는 신하들의 추대에 따라 한중왕이 된다.
이릉 전투와 유비 사망
유비와 조조가 한중에서 싸우는 동안 형주에 있던 관우는 조조의 장수 조인을 공격하고 원군으로 온 방덕을 참수하고 우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조조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있던 손권이 갑작스럽게 형주를 습격하여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빼앗았다.
220년 조비가 황제 칭호를 쓰자 221년 유비도 제갈량과 신하들의 추대로 인해 황제로 즉위한다. 이어 거기장군 장비가 측근인 범강과 장달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초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살해한 것에 대해 분노하여 정벌하려 했는데 손권이 편지를 보내 화해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운은 말리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고 제갈량도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말렸으리라 추측이 된다.
오나라 장군 육의와,유아,이이등이 무현과 자귀현에 주둔하였는데 유비는 장군 오반과 풍습을 보내 무현으로부터 이이등을 깨뜨리고 자귀현에 주둔시켰다. 이때 무릉과 오계의 만이가 사자를 보내 병사를 요청했다.
222년에는 오반과 진식이 이릉에 주둔하고 유비는 자귀현에서 산을 따라 이도의 효정에 진영을 둔다. 마량을 보내 오계의 만이를 위로하도록 하고 만이는 호응하여 행동을 일으켰다. 황권은 강북의 군대들을 통솔하여 이릉의 길에서 오나라와 대치한다. 그로부터 6월 무렵 육손은 요정에서 화공으로 유비의 군대를 공격하고 장군 장남과 풍습등의 머리를 베고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한다.
유비는 남은 병사를 모아 배를 버리고 육로를 통해 어복현으로 도주하였고 유비는 병사를 모아 무현으로 돌아온다. 유비가 백제성에 주둔했다는 말에 손권은 매우 두려워하여 화해의 사자를 보내고 유비는 승낙하고 종위를 보내 이 일을 매듭 짓게 하였다. 그 후 223년 이릉전쟁으로 인한 화병이 심해진 유비는 영안궁에서 63세 나이로 사망하였고 제갈량에서 후사를 부탁하였고 아들 유선이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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