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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64. 사마의 중달

[사마의 중달 司馬懿 仲達]

 

사마의의 자는 중달이며 하내군 온현 출신이다. 179년에 태어나 251년에 사망한다. 사마의는 서진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묘호는 고조이며 시호는 선황제이다. 사마의의 일족은 하내군의 명문 귀족으로 아버지 사마방은 경조윤을 지냈다. 사마방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자에 달자가 붙어 사람들은 사마팔달이라고 불렀다. [삼국지 정사]에는 사마의의 열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진서] 1권 선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박학하고 큰 지략이 있었다고 한다. 인물을 잘 알아보던 양준은 사마의를 비범한 인물이라 하였고 최염은 형 사마랑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대의 동생은 총명하고 성실하며 강단이 있고 영특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201 (건안 6) 조조는 순욱의 권유에 따라 사마의를 초빙하였지만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거절한다. [진서]에는 거절한 이유를 한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조씨에게 지조를 굽히는 것은 순결한 행동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조조는 사마의가 진짜 병에 걸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 황급히 도망치려 하면 살해하라고 하였다. 자객은 몰래 사마의를 엿보았는데 사마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208년 조조가 승상이 되자 다시 사마의를 초빙하여 문학연으로 삼으려 하였다. 조조는 사자를 보내면서 거절하면 목에 포승줄이라도 묶어서 데리고 오라 하였다. 사마의는 두려워하여 조조의 명에 따라 문학연이 되었다. 이후 사마의는 조조의 아들 조비와 교제하여 황문시랑, 의랑, 승상 동조속, 주부등을 거치게 된다.

 

215년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자 사마의는 유비는 속임수와 무력으로 유장을 붙잡아 촉인들이 아직 귀부하지 않았고 멀리서 강릉을 다투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며 익주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는 사람의 고통은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더니 한중을 얻었는데 또 다시 촉을 얻기를 바라는구나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216년 손권 토벌에 종군하여 이를 격파한다. 또한 조조가 위왕이 되자 사마의는 태자 조비의 중서자가 된다. 사마의는 늘 중대한 모의에 참여하여 매번 기책을 내어 놓아 태자 조비에게 신임을 얻었고 진군, 오질, 주삭과 함께 사우라 불리었다. 승진하여 군사마가 되었을 때에는 농사에 힘쓸 것을 조조에게 진언하였다. 조조는 진언을 받아들여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비축하니 국용이 넉넉해졌다.

 

형주자사 호수는 거칠고 남향태수 부방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둘다 변경에 두지 말 것을 진언하였지만 조조는 듣지 않았다. 결국 219년 관우가 번성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의 원군을 격파하자 호수와 부방은 관우에게 항복하여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 위급하게 되었다. 조조는 허창에서 하북으로 천도할 것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사마의는 천도를 하면 적의 사기를 높이고 아군과 백성에게 동요를 가져다줄 뿐이라고대답하였다. 조조는 사마의에게 대안을 물었는데 손권에게 관우의 배후를 치게 하면 번성의 포위는 자연히 풀릴 것 입니다라고 말해 조조는 사마의의 계책을 채택한다. 손권이 장수 여몽을 보내 공안을 기습하자 포위는 자연히 풀렸고 관우는 생포되어 참수되었다.

 

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즉위하자 사마의는 하진정후로 봉해지고 승상 장사로 전임된다. 조비가 황제 헌제에게 선양받아 위나라 황제가 되자 상서로 임명 된다. 225년에 사마의는 무군대장군,녹상서사가 되었다. 조비는 사마의를 매우 신뢰하여 사마의에게 짐이 동쪽에 있을 때는 서쪽을 맡고, 짐이 서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동쪽을 맡으시오라고 말했다. 얼마 되지 않아 조비가 사망하기 전에 조진,조휴,진군과 함께 후계자 조예를 부탁한다.

 

조예가 황제가 된 후 228년 신성태수 맹달이 제갈량에게 호응해 모반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마의는 완성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맹달을 안심시키면서 급히 행군하여 16일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맹달의 목을 수도로 보낸다. 230년에 사마의는 조진,장합과 함께 촉으로 침공하지만 장마에 막혀 군을 퇴각시킨다. 231년 제갈량이 4번째 북벌을 진행할 때 사령관이었던 조진이 사망한다. 사마의는 조진의 뒤를 이어 사령관이 되고 대장군에 임명되고 도독옹양제군사로서 장안에 주둔한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7번 동안 6차례에 걸쳐 진행되는데 1차 북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마의가 나섰고 총지휘한 것은 2번이다. 첫 대결은 231년 조진이 죽은 뒤 촉군의 약점이 식량 보급에 있음을 간파한 사마의가 지구책을 쓰고 그 전략을 발휘해 촉군은 퇴각하게 된다. 하지만 촉군을 추격하다가 장합이 전사한다.

 

234년 제갈량과의 두번째 대결을 하게 된다. 제갈량은 장기전을 예상해 3년에 걸쳐 준비하는데 오장원에 출진한 제갈량에 대해 사마의는 지구전을 펼친다. 제갈량은 부인용 머리 장식과 여러 장신구들을 사마의에게 보내고 비웃지만 사마의는 제갈량의 도발임을 알고 왕래하는 군사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묻고 그가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제갈량의 죽음을 안 군사 신비가 추격할 것을 주장하지만 사마의는 듣지 않고 천천히 진군한다. 그 것을 본 사람들은 죽은 공명이 살아 있는 중달을 쫓아냈다고 수군거렸지만 사마의는 죽은 자를 상대할 수 없다고 말하며 웃는다. 결국엔 정사에서는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승리한 것이지만 연의에서는 제갈량 보다 한 수 뒤지는 모습으로 나온다.

 

사마의는 태위에 임명되었고 237년에 요동태수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의는 관구검을 휘하에 두고 토벌에 나선다. 공손연은 양평성에서 방어만 하였는데 사마의는 지구전을 취해 천천히 공손연을 압박해 나간다. 결국 공손연은 사마의와 고구려 동천왕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고 공손연은 달아났지만 결국 사로잡아 참수한다.

 

사마의는 공손연을 토벌하고 귀환하던 도중 위독 상태였던 조예는 급히 도성으로 소환하였다. 조예는 조상과 함께 고명대신으로 임명하며 후사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조상은 처음에는 사마의의 연륜을 존중하여 부친처럼 대했으나 점점 실권을 빼앗아 가면서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사마의는 병으로 위장해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멀리 떠난다. 사마의를 배제한 조상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주색에 빠지게 된다. 사마의는 은밀히 조상에 대한 대비를 하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조상의 부하 이승이 형주자사로 부임하는 길에 사마의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사마의의 동태를 파악하였다. 사마의는 중병인 것처럼 행동하자 이승은 조상에게 이를 보고 한다. 조상은 이를 계기로 더욱 방심하게 되다가 249년 황제를 모시고 고평릉으로 외출하였을 때 사마의는 정변을 시작한다. 사마의는 도성의 무기고 및 주요 거점을 점거하고 조상의 죄상을 황태후에게 고한다.

 

대사농 환범은 조상에게 황제가 아직 자신들에게 있기 때문에 항전을 주장하지만 조상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사마의에게 가게 된다. 사마의는 조상에게 은거를 권하여 자택으로 돌려보내지만 결국에는 모반죄를 덮어 쓰워 처형한다. 이 사건을 고평릉의 변이라고 한다. 사마의는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서진의 기초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

 

251년에 왕릉이 초왕 조표를 옹립하려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의는 늙은 나이에 진압하기 위해 직접 출병한다. 반란은 진압하고 낙양으로 귀환하자마자 병상에 눕게 되는데 얼마 되지 않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후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나라 황제 조환으로부터 선양 받은 후 선제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