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소 자상 司馬昭 子上]
사마소의 자는 자상이며 하내군 온현 출신이다. 211년에 태어나 265년에 사망한다. 사마의와 장춘화의 둘째 아들이며 사마사의 동생이다. 사마소는 238년에 신성향후로 봉해지고, 정시 연간(240년 ~ 248년)에 낙양의 전농중랑장이 되었다. 이 때 황제 조예의 사치가 심하여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었는데 사마소는 부임하자마자 수탈을 금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아주 기뻐했다. 이후 산기상시로 전임된다.
대장군 조상과 정서장군 하후현이 촉을 정벌할 때 사마소는 정촉장군이 되어 하후현의 부장을 맡게 된다. 촉의 장군 왕림이 밤에 군영을 기습했는데 보기좋게 물리치기도 한다. 조상의 군대는 결국 후퇴하게 되는데 이 때 조상의 무능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귀환 후 사마소는 의랑으로 좌천 된다.
249년 (정시 10년)에 아버지 사마의를 따라 형 사마소와 함께 조상파를 제거하는 거사에 참여하게 된다.(고평릉의 변) 사마소는 서궁과 영녕궁을 수비하였고 결국 조상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바로 잡게 된다.
촉의 장군 강유가 농우를 침범하자 정서장군 곽회가 이를 막기 위해 출병하였고 사마소를 안서장군으로 삼아 관중에 주둔 하게 한다. 곽회가 강유의 부장 구안을 국에서 공격하였는데 오래토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사마소는 군대를 이끌고 장성에 주둔하고 남쪽으로 낙곡까지 내달려 적군을 미혹시키니 강유는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려 남정으로 퇴각한다. 이에 구안의 군대는 후방의 지원이 끊겨 항복하게 되었다. 사마소는 안동장군에 전임되고 허창에 주둔하였다.
왕릉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252년에 도독이 되어 정동장군 호준, 진동장군 제갈탄을 통솔하여 오나라를 정벌하였는데 동관에서 패배하여 혼자서 책임을 지고 지위를 박탈당한다. 254년에 강유가 다시 농우에 침범하자 토벌을 위해 사마소를 임시로 정서장군을 겸하여 장안에 주둔하게 된다. 옹주자사 진태는 적도를 점거하려 했으나 사마소는 강유가 강족을 공격하여 그 곳을 거점 삼으려 하는 것을 간파하였는데 강유는 군영을 불태우고 회군하였다.
신평의 강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가 직접 출병하여 격파하니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는데 이 공로로 다시 신성향후로 봉해진다. 조모가 황제에 오르자 고도후로 봉해진다. 255년 수춘에서 진동장군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는 후방을 맡아 낙양에 주둔하고 형 사마사가 반란 진압을 위해 직접 출병한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도중 병이 위독해지자 위장군이 되어 병문안차 파견된다. 사마사가 사망하고 사마소가 후계를 잇게 된다.
사마씨의 전횡을 좋지 않게 보고 있던 조모는 사마소에게 허창에 주둔하고 부하로 하여금 낙양으로 돌아오게 하였지만 사마소는 부하와 종회의 책략을 받아들여 명령을 무시한 채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귀환한다. 조모는 할 수 없이 사마소에게 사마사와 같은 직책에 임명하게 되는데 이는 황제 조모가 사마씨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부분이다.
257년 (감로 2년)에 사마씨의 전횡으로 양주에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정동대장군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제갈탄은 양주자사 악침을 죽이고 오나라에 자신의 아들 제갈정을 인절로 보내 구원병을 청하여 심각한 상황을 만들었다. 사마소는 청주,서주,형주,예주에서 징병하여 직접 출병하였다. 오나라에서는 문흠,당자,전단,전역 등을 보내 제갈탄을 구원하러 왔지만 결국엔 제갈탄은 토벌되고 참수된다.
사마씨의 권력이 확고해지자 불안감에 느낀 조모는 수백 명의 측근과 함께 사마소를 죽이기 위해 계책을 펼치지만 이를 눈치챈 사마소는 조모의 계략을 무마시키고 조모는 가충의 부하에게 살해된다. 사마소는 조환을 옹립하면서 위나라의 모든 전권을 잡게 되었다. 사마소는 통일을 위해 전쟁을 준비하게 되는데 제일 먼저 구상하던 것이 촉나라 정벌이었다. 당시 촉나라는 강유에게 의지하였으며 황제 유선은 환관 황호를 신임하며 부정부패에 빠져있었다. 이를 안 사마소는 등애와 종회에게 명령해 촉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촉나라는 어이 없게 무너지고 황제 유선은 항복하게 된다. 사마소는 진왕이 된다.
사마소는 후계자로 형에게 입양시킨 아들 사마유를 후계자로 지목하려 하였다. 사마유는 사마소의 차남이었으나 형 사마사가 아들이 없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형이 세운 나라라 하면서 사마유에게 물려주려한 것이다. 하지만 가충의 반대로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되는 데 이때 사마소는 병이 깊은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사마염이 후계자로 왕에 지목된 후 황제 조환에게 선양을 받게 되는데 사마소의 묘호를 태조이고 시호를 문황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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