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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32. 공손찬 백규

[공손찬 백규 公孫瓚 伯圭]

 

공손찬의 자는 백규이고 요서군 영지현 출신이다. 생년은 미상이고 199년에 사망한다. 공손찬은 용모가 수려하고 우렁찬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공손찬은 요서군의 문하서좌에 임명되었으며 그곳의 태수가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노식에게 보내 경전을 배우게 하였고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이 되었으며 요동속국의 장사로 임명된다.

 

공손찬은 일찍이 수십명의 기병을 이끌고 요새를 순찰하다가 수백 명의 선비족 기병을 발견하였는데 사람이 없는 정자로 물러라 직접 창을 들고 싸워 수십명의 선비족 기병들을 무찔렀다. 공손찬의 부하들도 절반 이상 목숨을 잃었지만 선비족은 타격을 입은 후 두 번 다시 요새에 침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손찬은 탁군의 영으로 영전되었다.

 

광화 연간에 양주 도적이 봉기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유주의 돌격 기병을 3000명을 징발하였으며 도독으로 공손찬을 임명하였다. 공손찬은 여양의 장순과 요서 오환족의 구력거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기도위로 승진한다. 요서속국의 오환족 탐지왕이 부족 사람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투항하였고 공손찬은 중랑장으로 승진하고 도정후로 봉해진다. 이후 진군하여 요동속국에 주둔하여 이민족과 5~6년 동안 공방전을 펼쳤다. 그 후 공손찬은 백마장군이라 불리며 이민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유주목에 황족 유우가 부임하여 덕의로써 이민족을 복종시키자 무력으로써 이민족을 다스리던 공손찬과 대립이 심해진다.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자 동탁은 유우를 대사마로 승진시키고 공손찬을 분무장군으로 임명하였다. 반동탁 연합군이 일어나자 동탁은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유우를 태부로 임명했지만 길이 막혀 명령을 전달하지 못하였는데 원소와 한복이 상의하여 유우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다. 하지만 유우가 거절하여 실현되지 못하였고 원소와는 우호 관계로만 남게 되었다.

 

유우의 아들 유화가 시중이 되어 장안에 머물고 있었는데 헌제는 낙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유화를 몰래 보내 유우의 군대를 맞이하려 하였다. 유화가 원술의 영지를 지날 때 유화는 원술에게 헌제의 뜻을 전하였는데 원술은 유우를 이용하여 외부 원조를 받으려고 유화를 억류한다. 원술은 유화를 협박하여 유우의 군대를 부르려 하는 편지를 쓰게 하여 유우에게 보냈는데 유우는 편지를 받고 수천 기병을 공손찬에게 주었다. 공손찬은 원술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제지하려 하였으나 유우는 듣지 않았고 공손찬은 원술이 사실을 알고 원망할까 두려워 하여 사촌 동생 공손월에게 수천 기병을 주어 원술과 손을 잡고 비밀리에 원술에게 부탁하여 유화의 군사 지휘권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후로도 유우와 공손찬의 사이가 더욱 벌어지게 되었고 유화는 원술에게 도망쳤지만 또다시 원소에게 붙잡히게 된다.

 

이때 원술은 손견을 보내 양성에 주둔시켜 동탁에 대항하게 하였는데 원소는 주앙을 보내 그곳을 탈취하게 하였다. 원술은 공손월과 손견을 보내 주앙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공손월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공손찬은 노하여 원소를 공격하려 군대를 반하에 주둔시킨다. 원소는 공손찬이 두려워 자신이 차고 있던 발해태수의 인수를 공손찬의 사촌동생 공손범에게 주어 화친을 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공손범은 발해군의 군사를 이끌고 공손찬과 합류하여 계교 까지 진군했다. 공손찬은 엄강에게 기주를 전해에게는 청주, 단경에게는 연주를 다스리도록 하였고 원소는 광천에 진을 세우고 국의를 선봉으로 하여 공손찬과 싸워 엄강을 포로로 잡았다. 결국 공손찬은 패배하여 유주로 달아났다.

 

유우는 공손찬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 선제 공격을 하였는데 도리어 공손찬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히게 된다. 때마침 동탁이 사망하고 헌제는 사자를 보내 유우의 식읍을 넓혀주고 육주를 감독하도록 하고 공손찬은 전장군으로 임명되고 역후에 봉해졌다. 공손찬은 유우가 황제를 참칭하였다고 무고하여 사자를 협박하여 유우를 참수한다. 이후 공손찬은 유주자사로 임명되었는데 공손찬의 이러한 강경수단으로 인심을 잃게 되었다.

 

유우의 종사인 선우보와 제주는 유주의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복수하려 하였다. 이들은 염유를 추대하여 오환족의 사마로 삼았고 염유는 오환족과 선비족의 군사들을 모아 노북에서 공손찬의 장수 추단과 접전을 벌여 죽인다 원소는 부장 국의와 유우의 아들 유화를 보내 선우보와 합류시켜 공손찬을 공격하였고 공손찬은 계속 패배하여 역경으로 도망가 수비만 공고히 한다.

 

199년 원소는 전군을 이끌고 공손찬을 포위하였다. 공손찬은 아들을 흑산적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구원병이 도착한 후 공손찬은 안팎으로 원소를 공격하려 하였지만 원소가 아들에게 기일에 맞춰 군대를 도착하면 불을 들어 알리라는 편지를 써 보냈지만 원소의 염탐꾼에 의해 편지를 손에 넣었다. 원소는 복병을 숨겨 놓고 약속한 기일에 불을 올렸는데 공손찬은 원군이 도착한 줄 알고 성밖으로 나갔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공손찬은 성으로 돌아와 수비를 굳건히 했지만 원소는 땅 밑으로 길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공손찬은 패배를 직감하고 자신의 처자식을 전부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공손찬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다른 사람의 잘못은 기억하면서도 장점은 까먹는 습관이 있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등 악명이 높았는데 [삼국지 연의]에서는 유비와 함께 노식의 문하에 들어 동문으로 형제 같이 지내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공손찬의 이미지가 정사의 평에 비해 비교적 좋은 사람으로 묘사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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