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총 백녕 滿寵 伯寧]
만총의 자는 백녕이며 산양군 창읍현 출신이다. 생년 미상이나 242년에 사망한다. 18세에 군의 독우가 되었는데 당시 군의 이삭 등이 각각 부곡을 끼고 평민들에게 해를 끼쳤다. 태수는 만총에게 그들을 규찰하도록 하였는데 이삭 등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다시는 약탈하지 않았다. 이후 고평현의 영이 되었는데 당시 고평현 사람 장포가 독우가 되자 탐욕스럽게 직책을 더럽히고 뇌물을 받아 행정을 어지럽혔다. 만총은 장포가 관사에 있을 때를 틈타 이졸들을 이끌고 그를 붙잡아 죄를 문책했다. 그날 중에 조사를 마친 다음 그대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조조가 연주를 평정하였을 때 만총을 불러 종사로 삼았다. 196년 조조가 대장군이 되었을 때 만총을 초빙하여 서조속을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허현의 영으로 삼았다. 당시 조홍은 조조의 종족으로 높은 신분이었는데 떄문에 조홍의 빈객들이 허현의 경계 안에서 자주 법을 범하는 자가 있었다. 만총은 그들을 붙잡아 죄를 다스렸고 조홍은 만총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말했지만 만총은 응대하지 않았다. 조홍이 조조에게 말하자 조조는 허현의 책임자를 불렀는데 만총은 조조가 장차 죄를 지은 자들을 용서할 것임을 알고 재빨리 그들을 죽였다. 조조는 기뻐하며 만총을 본받아야 한다고 칭찬하였다.
태위를 역임했던 양표가 체포되어 현의 옥으로 보내졌는데 상서령 순욱과 소부 공융등이 만총에게 고문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만총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법에 따라 심문하였고 며칠이 지나 만총은 조조에게 죄가 없음을 입증하고 조조는 그날 중에 양표를 사면시켰다. 처음에 순욱과 공융은 고문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화를 냈지만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갖게 되어 만총에게 감사했다.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할 때 여남은 본디 원소의 본적이 있던 군으로 문생이나 빈객이 각 현에 분포하여 저항하고 있었다. 조조는 이 점을 걱정하여 만총을 여남 태수로 임명한다. 만총은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 500명을 모으고 그들은 인솔하여 20여 성벽을 공략하고 아직 투항하지 않은 우두머리를 유인하여 앉은 자리에서 10여 명을 죽이자 단번에 모두 평정되었다.
208년 (건안 13년) 조조를 수행하여 형주를 정벌하였고 조조가 귀환할 때 만총을 남겨 분위장군을 대행하고 당양에 주둔시킨다. 손권이 동쪽에서 자주 침범하자 만총을 불러 여남태수로 임명하고 관내후의 작위를 준다. 후에 관우가 양양성을 포위했을 때 만총은 조인을 도와 번성에 주둔하며 저항하였다. 우금의 군대가 궤멸하고 장마로 인해 번성이 자주 물에 잠기자 사람들은 조인에게 도망갈 것을 권하였지만 만총은 지금 도망가면 이 일대를 다시 되찾을 수 없기 때문에 버텨야한다고 하였다. 결국 서황의 지원군과 손권이 형주를 기습하여 관우는 퇴각하게 되었고 만총은 안정정후에 봉해진다.
220년 (황초 원년)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양무장군으로 옮기고 다시 복파장군으로 임명되어 신야에 주둔한다. 조비는 남쪽정벌을 위해 정호에 도착하였는데 만총은 적의 화공을 간파하고 막아내어 남향후에 봉해진다. 222년 만총은 절월을 받았고 224년에 전장군으로 승진했다. 조예가 즉위하자 창읍후로 승진해 봉해진다. 228년에는 예주자사를 겸임하였고 229년 투항한 사람들이 오나라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강 북쪽으로 사냥을 나가려고 선전하면서 손권이 직접 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만총은 그들이 서양을 습격하리라 예측하고 대비를 하였는데 손권은 그 것을 듣고 돌아갔다.
이어 조휴로 하여금 여강 남쪽에서 합비로 들어가도록 하고 만총으로 하여금 하구로 가도록 했다. 조휴가 주방의 거짓 항복에 속아 남하하자 만총은 유인 작전인 것을 파악하고 상소를 올렸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조휴는 그대로 깊숙이 들어갔다. 오나라 군사들은 무강구로부터 협석을 끊어 조휴의 길을 차단하였는데 조휴는 퇴각하려 하였지만 고립된 뒤 격파당하고 만총은 조휴를 구원해 탈출시킨다. 그해 조휴는 사망하고 만총은 전장군으로서 도독양주제군사를 대행했다.
230년에 만총은 정동장군에 임명되었고 그 해 겨울에 손권은 합비를 공격하려 한다고 선전하였다. 이에 만총은 표를 올려 연주와 예주의 군대를 소집하였다. 오나라 군사들이 물러나자 만총은 군대를 물리라는 조서를 받았다. 하지만 적군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돌아간 것은 거짓으로 우리 군대를 물려 준비하지 못한 틈에 습격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물리지 말자고 표를 올렸다. 10여 일이 지난 후 손권은 다시 합비성을 공격하였지만 공략하지 못해 되돌아갔다.
231년 오나라 장수 손포가 항복을 청하였는데 자사 왕릉은 손포의 편지를 만총에게 보여 주고 그를 맞이할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만총은 틀림없이 거짓이라 판단하고 병사를 주지 않았다. 만총은 조서를 받아 조정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부의 장사에게 왕릉이 손포를 영접하려 하면 군사를 주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결국 왕릉은 군사를 얻지 못하자 한 명의 독장과 병사 700명을 보내 손포를 맞이하려고 보냈는데 역시나 손포가 매복하여 습격하니 독장은 도주하였다.
232년 육손이 여강을 공격하자 빨리 구원해야 한다 주장하였지만 만총은 이 것은 유인책이라 하며 군대를 정비하여 직접 양의구로 달려갔다. 적군은 위나라 대군이 동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즉시 달아났다. 매년 손권은 위나라를 공격하였는데 233에도 손권은 직접 출병하여 신성을 포위하려 하였지만 물이 멀리 떨어져 있어 배를 띄워 진격하지 못하였다. 만총은 즉시 군사 6000명을 은밀히 파견하여 은폐된 곳에 매복해 손권을 기다리게 하였는데 손권의 병력이 해안가를 올라오며 과시하고 있었다. 만총이 숨겨둔 복병이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고 도망가다 물속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234에도 신성을 공격하였지만 만총은 급히 달려가서 수십 명의 장사를 소집하여 소나무를 베어 화톳불을 만들어 마유를 흐르게 하여 바람 방향에 실어 불을 놓아서 적의 서을 공격하여 무기를 불태웠다.
235년 손권은 강북에서 밭농사를 짓도록 하고 8월이 되자 수확을 하려 하자 병사들이 성을 떠나 수 백리까지 나가있는 것을 알고 습격할 수 있다고 만총은 생각하였다. 만총은 장리를 파견하여 삼군을 인솔해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둔전하고 있는 군대를 격파하고 곡물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조예는 만총을 칭찬하고 획득한 전리품은 모두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38년에 만총은 나이가 들어 조정으로 불려가 태위로 승진하였다. 242년에 만총은 사망하였으며 시호를 경후라 하였다. 아들 만위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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