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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70. 신비 좌치

[신비 좌치 辛毗 佐治]

 

신비의 자는 좌치이며 영천군 양적현 출신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신평의 동생이며 형을 따라 원소를 모신다. 조조가 사공이 되었을 때 신비를 불러 벼슬을 내리려 하였지만 신비는 그의 명을 거절하였다. 관도전투에서 원소가 사망하고 장남 원담과 삼남 원상 사이에서 후계자로 인해 내분이 일어나는데 신비는 원담을 따른다. 원담은 신비를 항복 사자로 조조에게 보냈는데 훌륭한 변설로 조조를 감동시켰다. 204년 업성을 함락시키자 신비는 의랑으로 임명된다.

 

218 (건안 23) 마초와 장비의 침입해 대응하여 조조는 조홍을 파견해 하변을 평정한다. 신비는 조휴와 함께 참군으로서 따라간다. 조조가 한중에서 군대를 철수시킨 후 신비는 승상좌사에 임명된다.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신비는 시중으로 임명되고 관내후 작위를 받는다.

 

당시 역법제도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전 고대 하나라의 역법을 따를 것을 진언하였고 조비는 이를 따랐다. 또한 조비는 기주의 백성 10만호를 하남으로 강제 이주시켜 하남을 튼튼히 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해를 이어 메뚜기떼로 인해 백성들이 굶주려 이주시키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지만 조비의 결심은 매우 강력하였다. 대부분 관리들은 눈치를 보며 반대하지 못하였지만 신비는 조비에게 반대를 간언하였다. 조비는 화난 안색으로 신비와 이 일을 논의 하지 않으려 했지만 신비는 설득을 계속 하였다. 조비가 듣지 않고 들어가려 하자 신비는 조비의 옷자락을 잡고 간하였지만 조비는 이마저도 뿌리친 채 돌아보지도 않았다. 후에 조비는 신비를 따로 불러 이유를 물었고 결국에 절반인 5만호만 이주시키기로 하였다. 조비가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신비는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여 조비는 사냥 나가는 횟수도 줄였다.

 

상군대장군 조진이 강릉성을 공격할 때 신비는 군사로써 따라갔으며, 귀환 후 광평정후에 봉해진다. 조비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신비는 반대하였는데 조비는 결국 듣지 않고 출병하였지만 장강까지 갔다가 다시 귀환한다.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즉위하자 영창후에 봉해진다. 시중서감 유방과 중서령 손자가 조예의 신임을 받아 정권을 잡고 있자 그들과 교류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신비만은 그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후에 필궤가 신비를 왕사로 삼을 것을 조예에게 권하였는데 조예는 유방과 손자를 불러 이 문제를 상의하였다. 이들은 신비가 총명하고 정직하지만 강직하고 독단적이다라고 하였는데 조예는 결국 신비를 기용하지 않았고 지방으로 나가 위위에 임명된다.

 

조예가 궁전을 짓자 신비는 아직 천하가 평정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힘든 노역을 시키면 안된다 하며 반대하였고 조예는 자신의 계획은 중지 하였다. 234년 제갈량이 북벌에 나섰을 때 사마의는 제갈량과 여러 차례 싸우겠다고 청했지만 조예는 듣지 않았다. 더 이상 사마의에게 출병을 거부할 수 없음을 두려워한 조예는 신비를 대장군 군사로 삼고 사지절로 임명한다. 군에서는 모두 신비를 존경하여 지휘에 따랐고 감히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사망하자 신비는 돌아와서 다시 위위가 되고 신비가 사망하자 시호를 숙후라 하였다. 아들 신창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원상을 지지하던 심배가 자신의 가족을 모두 살해하자 업성을 공략한 후 심배를 죽일 것을 호소한다. 조조는 심배를 등용하길 원했지만 신비는 완강하게 반대하며 결국 조조는 심배를 죽인다. 2204년 조비가 조조의 뒤를 잇고 화흠,왕랑 등과 함께 헌제에게 양위를 강요하는 것으로도 나온다. 그 외에는 정사와 별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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