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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지 : 인물

삼국지 인물 249. 강유 백약

[강유 백약 姜維 伯約]

 

강유의 자는 백약이며 천수군 기현 출신이다. 202년에 태어나 264년에 사망한다. 강유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강유는 정현의 학문을 좋아했고 군에서 벼슬하여 상계연이 되었다가 주에게 초빙하여 종사가 되었다. 아버지 강경은 예전에 군의 공조일 때 강족과 융족의 반란으로 군 태수를 보호하다가 전쟁터에서 사망하였다. 그 때문에 강유에게 중랑 직책을 주었으며 본 군의 군사적인 일에 참여시켰다.

 

228 (건흥 6) 제갈량이 1차 북벌을 할 때 기산으로 출병하였는데 그 때 천수 태수 마준은 마침 밖으로 나와 강유와 양서, 윤상, 주기, 양건 등의 수행 하에 순찰을 하고 있었다. 마준은 촉나라 군대가 기산으로 온다고 하자 여러 현이 호응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유 등이 모두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 의심하였다. 그래서 한밤중에 도망쳐 상규를 지켰다. 강유 등은 마준이 달아난 것을 뒤늦게 알고 쫓아갔지만 성문에 이르렀을 때 성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하였다. 강유 등은 서로 이끌며 기현으로 돌아왔지만 기현에서도 강유 등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강유 등은 제갈량에게 귀순하였다.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대패하자 제갈량은 서현을 함락시켜 1000여 인가와 강유 등을 이끌고 귀환한다. 이 일로 강유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고 제갈량은 강유를 창조연으로 삼고 봉의장군을 더했으며 당양정후로 봉했다. 후에 중감군, 정서장군으로 승진했다. 234년 제갈량이 사망하자 강유는 성도로 돌아와 우감군, 보한장군이 되어 군사들을 통솔하고 승진하여 평양후로 봉해진다.

 

238 (연희 원년) 대장군 장완을 따라 한중에 주둔하였고 장완이 대사마로 승진하자 강유는 사마가 되어 여러 차례 한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을 쳤다. 243년 진서대장군으로 승진하고 양주자사를 겸했다. 247년에 위장군으로 승진하고 대장군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가 되었다. 문산군 평강현에서 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강유는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또 농서, 남안, 금성의 경계로 나아가 위나라 대장군 곽회, 하후패 등과 조수 서쪽에서 싸웠다. 호왕 치무대 등이 마을을 바치고 투항하였는데 강유는 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249 (연희 12) 강유에게 부절을 주어 서평으로 출정하도록 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는 자신이 서쪽 지역의 풍속에 익숙하며 아울러 자기 재능과 무력에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강족과 호족을 회유하여 오른쪽 날개로 삼으면 농산 서쪽을 위나라에서 끊어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강유가 대규모 출병을 하려 할 때 마다 비의는 번번히 그 것을 제지시키고 그에게 준 병력은 만 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253 (연희 16) 비의가 사망하자 강유는 수만 명을 이끌고 석영을 나와 동정을 지나 남안을 에워쌌지만 옹주 자사 진태가 포위망을 풀고 낙문까지 이르자 강유는 식량이 다 떨어져 물러나 돌아간다. 254년에 강유는 독중외군사 직위를 더했다. 다시 농서로 출병하였고 적도현을 지키던 이간이 투항하였다. 강유는 나아가 양무를 둘러싸고 위나라 장수 서질과 싸워 참수하고 적을 깨뜨리니 위나라 군대는 패하여 물러났다. 강유는 승세를 몰아 여러 성을 항복시켰으며 하관, 적도, 임조 세 현의 백성을 빼앗아 돌아왔다.

 

256 (연희 19) 강유는 대장군으로 승진하였고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진서대장군 호제와 상규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호제는 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강유는 단곡에서 등애에게 격파되어 많은 병사들이 흩어지거나 사망하였다. 병사들은 이로 인해 강유를 원망하였고 농서 서쪽 지역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했다. 강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강유는 후장군, 행대장군사로 강등되었다.

 

257 (연희 20) 위나라 정동대장군 제갈탄이 회남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관중에 병사들을 나누어 회남으로 이동하였다. 강유는 그 틈을 타서 진천으로 향하려고 또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을 나와 곧장 침령에 이르렀다. 그 때 장성에는 매우 많은 곡식이 쌓여 있었지만 지키는 병사가 적었는데 강유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다. 위나라 대장군 사마망이 지키고 있었고 등애도 농우에서 출병하여 장성에 진을 쳤다. 강유는 앞으로 나아가 망수에 주둔하고 산에 기대어 진영을 만들었다. 사마망과 등애는 영채를 굳게 지키고 강유가 몇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258년에 제갈탄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하였고 다시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강유는 돌아와 한중의 방어 체제를 바꿀 것을 건의하였다. 유비는 지난날 한중을 점령하고 위연에게 지키도록 하였는데 성마다 모두 병력을 충실히 하여 밖에서 오는 적을 막도록 해 설령 적이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위연에서 왕평에 이르기 까지 모두 이 제도를 이었는데 강유는 한중에 들어온 위나라 군사들을 포위하여 섬멸할 수 없기 때문에 한중에서 위나라 군사들을 포위하여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적을 물리치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 결과 독한중 호제를 한수까지 물러나게 하고 감군 왕함은 악성을 지키고 장빈은 한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또 서안, 건위, 무위, 석문,, 무성, 건창, 임원에 모두 수비진을 주둔시켰다.

 

262 (경요 5) 위나라의 사마소는 촉나라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하는데 사마소는 선박을 건조하여 오나라를 치는 척 하면서 종회를 도독으로 삼고 등애와 제갈서로 하여금 촉나라를 정벌하도록 한다. 강유는 후화로 출병하였다가 등애에게 패배하여 답중으로 돌아와 주둔한다. 당시 촉나라 조정은 환관 황호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황호는 우대장군 염우와 결탁하여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대장군으로 세우려 하였다. 강유도 그들을 의심하여 자연스레 위혐을 느껴 성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263 (경요 6) 강유는 유선에게 위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을 방비해야 한다고 표를 올렸지만 황호의 방해로 유선은 묵살하게 된다. 종회가 낙곡으로 향하고 등애가 답중으로 들어온 다음에야 우거기장군 요화를 답중으로 보내 강유를 돕게 하고 좌거기장군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 등은 양안 관구로 가서 여러 진영의 밖에서 지원부대가 되도록 하였다. 음평까지 왔을 때 위나라 대장 제갈서가 건위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멈추어 그들을 기다렸다. 한 달 남짓 지나서 강유는 등애에게 격파되어 음평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종회는 한성과 악성을 공격하며 포위하고 따로 장수를 보내 양안 관구로 진격하도록 하였고 장서는 성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부첨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종회는 악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관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자 계속 달려 진격하였다. 장익과 동궐이 한수에 이르자 강유와 요화도 음평을 버리고 물러났는데 마침 장익과 동궐이 회합하여 모두 검각으로 물러나 지키며 종회에게 저항했다. 종회는 함락시키지 못하고 식량을 실어 나르는 곳이 멀어서 장수들과 상의하여 돌아갔다. 등애는 음평으로부터 경곡도 옆을 지나 촉 땅으로 들어와 마침내 면죽에서 제갈첨을 깨뜨렸다.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기를 요청했으나 등애는 진군하여 성도를 차지 하였다. 이 때 강유는 성도의 소식을 잘 알지 못해 군대를 이끌고 광한, 처로부터 나아가 허실을 살폈는데 오래지 않아 유선의 칙령을 받고 곧 무기를 놓고 부현의 군영 앞으로 가서 종회에게 이르렀다. 장수들은 모두 분노하며 칼을 뽑아 돌을 잘랐다.

 

종회는 강유 등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의 인, 부절, 거개를 돌려주었다. 종회는 강유와 나가게 되면 같은 수레를 타고 앉을 때도 같은 자리에 앉았다. 종회는 속으로 모반할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후에 등애를 죄인으로 만들어 호송 수레로 소환되어 가자 강유 등을 이끌고 성도에 이르러 스스로 익주목으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강유에게 병사 5만 명을 주어 맨 앞에 서게 하려고 했는데 위나라 장수들이 분노하여 종회와 강유를 죽이고 강유의 처자식도 모두 죽였다.